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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er than day before
  • 댈러웨이 부인
  • 버지니아 울프
  • 11,700원 (10%650)
  • 2025-05-14
  • : 1,521


드디어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한 권 읽었다. 우연히 스레드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소개 글을 읽었고, 그것을 계기로 읽다말다를 반복하던 <댈러웨이 부인>을 완독할 수가 있었다. 너튜브의 플롯 서머리 콘텐츠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초반에는 제법 도움을 받았는데, 책읽기가 본궤도에 오른 다음에는 그냥 내리 읽을 수가 있었다.

 

20세기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을 대표한다는 울프의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되다니. 역시 어느 책을 만나게 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23년 6월의 어느 날이다. 주인공은 오늘 파티를 열기로 한 댈러웨이 집안의 여주인 클래리사다. 과연 의식의 흐름대로,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유와 시간을 넘나들며 그들이 펼쳐 보이는 서사가 잇달아 등장하기 시작한다. 현재는 1923년의 런던이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33년 전 1890년대의 보턴이다.

 

당시 클래리사에게는 피터 월시라는 애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은 스스로를 사회의 낙오자라 생각하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회주의자 피터는 지금도 여전히 호주머니 속에서 주머니칼을 놀리는 중년의 남성이다. 클래리사는 매력적인 피터 대신, 재미는 없지만 미래의 안정과 경제력을 고려해서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했다. 과거의 그런 선택이 지금의 속물적인 성향의 클래리사를 탄생시킨 걸까. 아니면 소설을 따라 가다 보면 알게 되는 것처럼 원래부터 클래리사는 그런 인물이었던 걸까. 어디선가 들리는 피스톨 사운드. 그것을 계기로 또 다른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설의 또 한편에는 1차 세계대전 베테랑 출신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있다. 전쟁영웅으로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청년이지만, 그는 5년 전에 끝난 전쟁의 심각한 PTSD 증상을 겪고 있다. 자신의 상관으로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사한 에번스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탈리아에서 만난 (루크)레치아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또한 사랑 없는 결혼의 전형처럼 보인다. 사랑 없는 결혼에 그는 죄책감을 느낀다. 런던 상공에 비행기가 '스카이라이팅'이라는 기법으로 신박한 광고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11시 무렵에 클래리사는 단골 꽃집에서 웨스터민스터 저택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30년 전, 보턴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샐리 시턴과의 우정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 마디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종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고나 할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샐리는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교양까지 있어서 플라톤도 읽었다고. 심지어 클래리사는 그녀와 키스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그 다음 주자는 클래리사의 옛 애인 피터 월시다. 그는 5년 만에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만난 데이지와 결혼하기 위해 런던의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던가. 현실세계에 클래리사가 있다면, 그 반대편의 이상 혹은 판타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버지니아 울프는 피터 월시를 배치했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의 곳곳마다 부딪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적 충돌이야말로 <댈러웨이 부인>을 이끌어 가는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소설의 가장 비극적 인물은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있다. 저명한 신경과 의사인 윌리엄 브래드쇼는 셉티머스에게 중증 신경 쇠약 진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셉티머스에게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떨어진 시골 요양소에 가보라고 권고한다. 이미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져 버린 그에게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브래드쇼와의 진료는 왠지 신부님과의 고해성사를 연상시킨다. 그나저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혹한 운명을 어쩌면 처음부터 지각하고 있어서 그런 진 몰라도 "그 사건"이 도대체 언제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시계는 가열차게 돌아간다. 누군가는 세상의 고통에 시달리고, 또 주류세계에서 낙오했다는 상실감이 넘실거리는 가운데서도 오늘 저녁 자신의 저택을 방문할 인사들에게 최상의 음식과 마실 것들 그리고 최상의 환대를 대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클래리사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클래리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파티는 그녀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직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 보지 못해서 작가의 작품에서 시간의 역할에 대해 공통적인 분석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역시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치유를 위한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시간은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무엇이라면, 셉티머스처럼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에게는 결국 "엔딩", 그러니까 종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파티에 최선을 다하는 클래리사 댈러웨이가 정작 그 서커스처럼 돌아가는 파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감정의 고백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런던 사교계의 파티라는 것이 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고려한 의무에 가까운 게 아니었나 하는 심정이란 말이다. 게다가 무슨 절차와 과정 그리고 의례가 많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쇼맨십에 가까운 과장된 다정함은 부담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파티에 초대받지도 못한 클래리사의 옛 친구 샐리 시턴이 등장하면서 많은 주의를 기울여 준비한 파티에 균열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30년 전, 나체로 패리 하우스의 거실을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샐리답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례를 반가움으로 눙치는 내공을 시전한다.

 

등장인물들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의식의 교차 같은 흐름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증폭된 불확실성에 대한 근원이 어쩌면 과거의 어느 특정한 선택으로부터 유발된 게 아닌가라는 사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아울러 작가가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 시간의 설정은 내가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한 가늠자 같은 은유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가끔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화자의 전환이나 혹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마치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 같은 맹렬한 시간의 분노를 마주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그 시간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같은 캐릭터는 결국 부서지고 만다. 스타일리스트 피터 월시는 자기 나름의 회피라는 방식으로, 그리고 주인공 클래리사는 런던의 명사들과 즐겁지도 않은 파티라는 도피처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간에 맞선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책을 마저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그런 사유들을 미처 기록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또 나중에라도 다시 읽게 된다면 어떤 다른 생각으로 만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제 다음으로 울프의 16세기 로맨스물인 <올랜도>를 읽는다. 이 책도 역시나 재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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