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건 아무래도 운명이지 않을까 싶다. 무려 18년 전에 읽은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가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그 때 밀레니엄 감성으로 에미 로트너와 레오 라이케가 빚어내는 이메일 사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고 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아무래도 운명적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만남의 계기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항상 나의 예상을 벗어나기 마련이니 말이다.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가는 에미와 레오의 관계를 잘못된 이메일 수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잡지 구독 취소를 여주인공이자 웹디자이너 에미 로트너가 엉뚱한 이메일 주소로 보내면서 판타스틱한 이메일 사랑이 시작된다. 수신자는 언리심릭학자라는 레오 라이케.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실시간도 아닌, 시간차를 두고 마치 핑퐁 게임을 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이메일 주고받기는 독자에게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직접 대면으로 만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어느 일방이 답신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끊어질 수 있는 아주 위태로운 관계였다. 물론 에미와 레오가 계속해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그런 위기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또 관계의 묘미란 게 그런 게 아니겠는가.
나는 단박에 에미 로트너가 타고난 냉소주의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1번, 2번 식으로 번호를 매겨 가며 쪼아대는 품새에서 그런 점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레오가 구사하는 독일식 유머도 딱히 호감이 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 레오의 전여친 마를레네의 등장, 어머니의 죽음 같은 사건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갈등이 빚어지고 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에미와 레오는 가상현실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둘은 손님들로 북적이는 후버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소설의 어디선가 지인들이 말해준 것처럼 에미와 레오가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순간 그들이 빚어내는 서사는 바로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레오는 “식별놀이”라는 미명 아래 여동생 아드리네를 동원해서 세 명의 에미 후보들을 선발하는 꼼수를 쓰기도 한다. 나는 어느 지점에서 레오를 요즘 말로 하면 영포티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기도 했다. 무시로 들어오는 에미의 공격을 능란하게 받아치는 재치가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와인이나 위스키에 취해 취중진담을 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연애의 실수들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를 게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전에는 보통 전화가 매개체였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메일로 진화했다는 점 정도를 변별점으로 들 수 있을까. 하긴 요즘에는 전화-이메일을 뛰어 넘은 메신저라는 아주 효과적이면서 치명적인 대체 수단이 개발되긴 했지만 말이지.
에미와 레오는 결국 음성메시지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서로의 실체에 다가서는 방식을 택했던가. 18년 전에는 마침 오디오 레코딩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메시지를 녹음해서 파일로 만들어서 보내는 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조차 유치해 보이게 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서간체 소설로도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그 방식이 편지가 아닌 이메일이라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일방적인 방식이었다는 느낌이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메일 역시 즉답을 받으면 좋겠지만, 드라마 <글로리>에서 하도영이 말했다시피 무응답도 응답의 한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뛰겠지만.
에미와 레오 간의 소위 밀당은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가 둘 사이의 오간 이메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동안은 판타지에 가까웠다면, 베른하르트라는 변수이자 메기가 느닷없이 등장해, 레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메일로 전달하면서 조금 당혹스럽게 리얼리티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던 에미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에미가 자신의 멋쟁이 친구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시켜 주는 장면도 있었지. 에미는 왜 자신이 직접 레오를 만나지 않고 대리인으로 미아를 선택해서 레오와의 만남을 주선했을까. 아마 에미는 레오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고 그런 시도를 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레오는 에미가 던진 제안을 덥썩 물었고, 레오는 에미의 예상과는 달리 미아와 썸을 타기도 했다. 문제는 레오와 미아는 에미가 설정한 대로, 썸 이상의 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에미가 설정한 거라면, 정말 대단한 연애의 고수가 아닐까.
어쨌든 그 수많은 고민과 오해의 시간을 뛰어 넘어 에미와 레오는 결국 만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그 둘은 과연 만났을까? 적절한 순간에 소설을 끝맺는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가는 마치 후속작 <일곱번째 파도>를 예상하고 이런 결말을 예비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18년 전에도 너무 재밌게 봐서 당연히 후속작인 <일곱번째 파도>도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리뷰 기록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그 책은 읽지 않은 것 같다. 그건 1년이라는 출간의 시간차 공격 때문이었을까? 이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싶어졌다.
처음 읽을 적에는 내가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그렇게 공감하지 않았나 싶다. 에미와 레오의 감정들이 충돌할 때는 같이 공조하면서 흥분하기도 했고, 둘이 온라인 와인 데이트를 할 때는 그 정취에 취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덤덤할 따름이다. 그냥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관조가 섞인 무심한 감정이 들 뿐. 그래도 여전히 에미와 레오의 티키타카는 재밌고 유쾌했다. 물론 한줌의 씁쓸함도 빠질 수는 없겠지. 그렇게 내 삶에 스쳐 지나간 다양한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