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다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다. 읽을 때마다 그전에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들을 새롭게 픽업할 수 있고, 또 예전에는 그렇게 읽었었지라는 추억과 만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어쨌든 좋단 말이겠지.
16살의 나이에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은 소년 세풀베다는 헤이허브 선장 그리고 포경사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지구끝 파타고니아로 향한다. 그 때가 아마 1965년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 국가 칠레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선거혁명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포경사에 대한 낭만적 꿈을 품고 고래 살육의 현장에 도달한 소년은 향유고래가 사냥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에서 읽은 것과 냉정한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선원에 대한 꿈을 접었다. 포획당한 고래가 해체되는 모습은 왠지 칠레에서 벌어진 선거에 의한 사회민주주의 실험이라는 고래가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일거에 압살당하는 장면과 겹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2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독일 함부르크에 정착하게 된 그린피스 대원 세풀베다는 지구끝에서 일본 포경선 니신마루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학생운동의 지도자 활동을 하다가 투옥과 수감생활 그리고 다시 재수감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독일 앰네스티의 지원을 조국 칠레를 탈출해서 독일에 정착하게 된 현재의 세풀베다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1979년에는 그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는 단순한 저널리스트가 아닌 혁명가였구나.
망명 이래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밟게 된 세풀베다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산티아고에 오래 머무를 틈도 없이 그는 자신에게 연락을 취한 호르헤 닐슨 선장을 만나러 지구끝으로 향한다. 호르헤 닐슨은 피니스테레 호의 선장으로 조수 페드로 치코와 더불어 동포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는 왠지 다른 지구끝보다도도 더 파타고니아에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라틴아메리카는 컬럼버스의 항해 이래, 서구세계의 약탈지였다. 서인도 제도의 금과 은을 찾아나선 스페인 탐험가들과 그들의 후예들은 막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자원들을 본국으로 반출했다. 세기가 바뀌어서는 그곳에 널린 다른 자원들에 눈독을 들였다. 자원 채취를 위한 환경파괴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조치였다. 그런 환경파괴로 인한 현지 인디오들의 삶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파괴와 착취의 연대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게 세풀베다의 증언이다.
세풀베다들이 들른 어느 항궁에 산더미처럼 쌓인 톱밥들은 일본 제지공장으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하지만, 숲에서 베어진 나무들이 종이를 만들기 위한 톱밥으로 만들어지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나무마저 이런대, 일본 포경선의 목표가 된 세계적 멸종위기종 참거두고래의 운명은 또 어떨까.
부유한 이들의 입맛을 돋우는 식도락 재료로 필요해서, 혹은 값비싼 화장품에 들어가는 유지로 사용되기 위해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고래들이 희생되어야 한단 말인가. 대양의 유령선으로 위장해서 고래사냥에 나선 니신마루 호의 선장 다니후지는 잠재울 수 없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니 어쩌면 별미를 찾는 혹은 신비로운 향기를 내는 향수를 원하는 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의 발현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그런 욕망이 다니후지 같은 인물들을 위험한 난바다로 내모는 동인이라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 같다.
조그만 범선 피니스테레를 몰고 고래 학살의 현장에서 거대한 포경선 니신마루 호에 호르헤 닐슨과 바다에서 나고 자란 페드로 치코의 돌진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무모한 도전에 일단의 참거두고래들이 응답해왔다. 이거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연대가 아닌가 말이다. 닐슨과 페드로 치코의 안내로 현장에 도착한 칠레인은 사진 촬영을 포기한다. 그 때 칠레인의 경험이 훗날 <세상 끝의 세상>의 땔감이 되었다.
표지에 실린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고래의 이미지는 아무런 제약 없이 대양을 누비며 사는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풀베다 선생이 묘사하는 파타고니아에 대한 글을 보면 언젠가 꼭 한 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