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2월부터 극심한 독서 슬럼프에 빠져 있다. 연말에 무리(?)를 해서 연간 독서 100권을 채울 수도 있었으나, 어느 순간 그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뒀다. 대신 너튜브의 세계를 자유롭게 주유했다. 그조차도 또 무슨 의미겠는가만. 돌고 돌아 다시 루이스 세풀베다를 읽는다. 독서 슬럼프 탈출에 이제는 코로나로 하늘의 별이 된 세풀베다 작가의 책들만한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서가에서 <핫 라인>을 집어 들었다. 집중해서 읽으면 하루면 되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생각으로. 하지만, 세풀베다의 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타고니아 아이센 출신의 마푸체 인디오 출신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 형사가 인도하는 칠레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고향 아이센에서 거의 신기에 가까운 실력으로 사건을 처리해온 카우카만 형사는 일단의 소도둑을 상대하다가 곤경에 처한다. 우지 기관총을 들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소도둑 우두머리의 엉덩이를 레밍턴 소총으로 무려 70%나 날려 버린 것이다. 좋지 않다. 결국 그는 칸테라스 “장군”의 미움을 받아 난폭하게 총기를 휘두르는 무식한 형사라는 낙인이 찍힌 채, 고향을 떠나 수도 산티아고의 한직으로 전보를 받는다.
피노체트의 악명 높은 17년 군사독재에서 세풀베다의 조국 칠레는 마침내 해방되었지만, 정재계를 장악한 장군들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렇게 스모그로 오염된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한 카우카만은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택시 운전사 아니타 레데스마와 사랑에 빠진다.
나중에 밝혀지게 되지만, 1973년 9월 11일의 쿠데타와 상관없이 멀리 떨어져 살던 카우카만과 달리 아니타는 이른바 패배자 집단의 일원이었다. 남자친구는 끌려 가서 실종이 되었고, 자신 역시 군부에 끌려가 고문당한 희생자였다. 이런 복잡한 칠레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핫 라인>에 대한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나 역시 세풀베다를 읽으면서 칠레의 암울했던 현대사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칸테라스로 대변되는 기득권의 복수는 집요했다. 카우카만를 처리하기 위해 장군은 킬러를 파견해서 우악스러운 마푸체 인디오 출신 형사를 협박한다. 하지만 그들은 마푸체 인디오 전사의 후예였던 카우카만을 너무 쉽게 본 모양이다. 카우카만은 포크로 자신을 찾아온 킬러들을 응징한다. 다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구사하는 폭력을 뛰어넘는 거대한 폭력의 행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암시가 배어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자 이제, 망명했다가 귀국해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핫 라인”을 개설한 배우 부부가 등장할 차례다. 바로 지금부터 세풀베다 작가는 칠레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암울한 잔혹사를 배치한다. 민주화 이후 민중의 들끓는 욕망으로 대변되는 핫 라인과 과거 칠레 군부가 저질렀던 잔혹행위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되면서 우리의 히어로 카우카만을 위기로 몰고 간다.
과거의 악으로 상정된 빌런 칸테라스는 세 명의 전문 킬러들을 고용해서 카우카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 버리겠다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습관으로부터 칸테라스들은 벗어날 수가 없다. 과거에 그랬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군사독재 콜라보들에게 부여한 광범위한 사면권은 오히려 국가통합의 저해로 작동했다는 것을 세풀베다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과거에 당한 고문의 심각한 PTSD를 겪고 있던 연인 아니타를 카우카만은 ‘우이냐’라고 부른다. 자기보다 압도적인 무력과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에게 무소용이지만, 하다못해 단발마적인 저항을 보여 주었던 칠레 야생 고양이들의 비유라고나 할까. 카우카만 역시 우이냐답게 칸테라스로 대변되는 권위주의 권력집단에 대한 일견 무모해 보이는 저항정신의 화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아니타를 필두로 한 여성들의 연대가 보여주는 행진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부지런히 산티아고 거리를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차의 등장하는 엔딩까지 완벽했다.
<핫 라인>에서 루이스 세풀베다는 간략하지만, 강렬한 메시지와 투박하지만 센스 만점의 파타고니아식 유머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지금 한창 떠내 보내야할 책들과 소장할 책들 분류에 정신이 없는데 <핫 라인>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책이다.
[뱀다리] 그나저나 왜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들의 많은 책들이 다 절판과 품절의 운명에 처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