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부터 읽고 싶어하던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를 드이어 읽었다. 사실 책이 나오자 마자 구매했지만, 읽는데는 거의 석달이나 걸렸다. 그것도 달궁 책 모임 당일날 다 읽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기대가 커서일까, 그리고 미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라는 마크 트웨인의 원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생각나서 그런지 어쩐지 책읽기 진도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나머지 부분들은 독서모임 동지들의 생각들을 들어 보고서 채울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서양 문학이 부러운 점 중의 하나는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 그리고 <오디세이아> 같이 얼마든지 스핀오프로 우려 먹을 수 있는 원전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금의 추세인 글로벌하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퍼시벌 에버렛은 뭐랄까 새로운 도전보다는 원전의 스핀오프라는 안전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참, <제임스>는 퍼시벌 에버렛 작가의 24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국내에 소개된 다른 작품은 하나도 없다.
<제임스>의 주인공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헉”의 사이드킥이라고 할 수 있는 짐이다. 처음부터 제임스는 노예 이름인 “짐”을 버리고 제임스로 거듭나기를 시도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제임스는 자신을 다른 곳에 팔아 버리기로 마음 먹은 왓슨 부인의 시도를 알아채고, 목숨을 건 도주에 나선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 노예는 엄청난 자산으로 간주되었다. 흑인 노예에 대한 가혹한 감시와 처우는 어쩌면 그런 점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자본주의라는 미명 아래 거행된 물신주의 천국 미국에서 개인 자산의 상실은 노예주 입장에서는 참을 수가 없는 엄청난 일대 사건이었다. 그래서 영화 <해방>에서 보듯 노예사냥꾼들을 동원해서 도주한 노예를 잡아 주변에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주인공 제임스는 대처 판사의 서재에서 책을 통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나는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묘사된 대로 무식한 짐이 소설을 통해 제임스로 확고한 정체성을 갖춘 캐릭터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제임스는 지적으로 당대 저명한 계몽주의자들과 꿈에서 지적 토론을 할 정도로 백인 주인들을 능가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춘 캐릭터였다. 그런 그가 결국 엔딩으로 갈수록 복수의 화신으로 변신해 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헉은 주정뱅이 아버지의 가정 폭력으로부터 그리고 제임스는 자신과 가족을 소나 말 같은 재산으로 생각하는 노예주들의 폭압으로부터 도주를 시도한다. 둘 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지만, 이 게임에서 제임스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는 백인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히는 순간 바로 나무에 매달리는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주변의 상황도 절대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헉이 성인 남자였다면 제임스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노예를 허용하지 않는 비노예주인 일리노이까지의 여정이 그나마 순탄했겠지만 소년 헉이 성인 노예를 부린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왕과 백작이라 불리는 사내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결국 제임스는 다시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독서모임에서는 제임스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지적이 있었다. 제임스는 자신에게 자신을 쓸 수 있는 연필 한 자루가 소중했겠지만, 그 연필 한 자루 때문에 젊은 조지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목숨을 건 탈주의 과정 와중에도 어디선가 얻은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에서는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저마다 각각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진 이들에게 동일한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게 과연 이성적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제임스와 엮인 흑인 노예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기보다 비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점도 참 아쉬웠다. 젊은 조지나 같이 탈출하다가 결국 백인 노예사냥꾼에 총에 맞아 죽은 새미의 경우를 보라. 그 모든 난관을 헤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만나겠다는 제임스의 불굴의 의지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를 해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런 점에서 영화 <해방>의 주인공 윌 스미스가 연기한 피터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소설 초반에는 비중 있게 등장하던 헉의 존재감도 소설이 진행될수록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진짜 주인공 제임스가 서사의 배턴을 이어 받아 그야말로 날개 달린 캐릭터로 변신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제임스의 지적 능력이 뛰어 나다고 하더라도, 독학으로 당대 계몽주의 철학가들의 사상을 발전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제임스는 남북전쟁이 일어나던 19세기 중반의 인물이라기보다 너무 현대적 캐릭터라는 말이다. 어쩌면 그런 점들이 내가 소설 <제임스>에 몰입하게 만들지 못한 그런 이유가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가 확실히 재밌고, 잘 읽히는 대중적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제임스라는 캐릭터를 퍼시벌 에버렛 작가가 좀 더 정교하게 창조해 주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부터 너무 완성형 캐릭터라, 제임스에게 무언가 발전 지향적 모습들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 한 편만으로 24편의 소설들을 발표한 퍼시벌 에버렛 작가를 평가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버렛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고 나서 평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