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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er than day before
  • 토볼트 이야기
  • 로베르트 발저
  • 10,800원 (10%600)
  • 2025-03-28
  • : 1,259

 


로베르트 발저는 여전히 내가 어려운 작가로 인식되어 있다. 그의 이런저런 책들을 수집해 놓았지만, 정작 읽은 책은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유일하다. 읽은 내용은, 언제나처럼 기억 속에서 휘발해 버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제 오후 느즈막하게 도서관으로 <토볼트 이야기>를 빌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날이 선선해져서 걷기에 너무 좋았다. 문득, 내 그런 모습이 단거리 산책에 특화된 "토볼트"와 유사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기 초, 발저 작가에 의해 창조한 토볼트라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본다. 우리는 왜 타인에게 먼저 다가서기 보다 그가 나에게 다가 오기를 기대하는가. 어쩌면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 무언가에서 비롯된 심리가 아닐까. 청년 토볼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적극적인 시도가 없다면 그 누구와의 관계도 진전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어느 정도의 호응도 필요하겠지만.

 

짧은 다섯 편의 이야기를 통해 토볼트 청년에 대한 가늠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물론 실제적인 발저 작가의 체험에 의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제로 상부 슐레지엔의 담브라우 성에서 190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시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실패한 시인이었던 유사 지식인 토볼트는 11월 사냥철을 맞아 30년 전쟁 당시 지어진 K백작의 성을 방문하는 귀족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고용된 임시 하인 신분으로 등장한다.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가 "빛의 마법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의 곳곳에 비치된 램프를 도맡아서 관리했다. 심지어 그 일을 좋아했다. 노동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도 노동의 고단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어쩌면 토볼트/발저는 스스로에게 그런 주문을 걸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던 일은 난로 관리였다. 오래된 성의 난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난로였으리라.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달하기 위해 벽난로 관리는 시종으로서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이었다. 빛과 열을 전달하는 일종의 마법사 같은 일에 토볼트는 특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했다. 이런 걸 이른바 "하인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누군가에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굴욕적이거나 혹은 아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토볼트의 정신세계는 보통 사람의 그것과 많이 달랐던 게 아닌가 싶다.

 

토볼트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거친 행동을 일삼는 폴란드 출신 청지기와 거칠게 충돌한다. 그리고 곧바로 시종장에게 가서 자신이 우락부락한 청지기에게 뺨을 맞을 뻔한 사건을 고자질한다. 백작의 시종장은 백작의 식사 시중을 들며 거의 곡예에 가까운 실력을 보이는 토볼트에게 '품위'를 지키라고 비난에 가까운 경고를 날린다. 성에서 토볼트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좋았지만, 시종장을 비롯한 고인물 인사들은 귀족이 지켜야 하는 품위에 좀 더 많은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족들은 특권 계급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예절과 관습 그리고 품위와 변별력을 강조했다.

 

한편 토볼트는 관찰을 통해, 귀족들의 세계를 <귀족에 대한 연구>라는 글에 담아냈다. 백작은 무엇을 먹고, 듣고 하는 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다. 토볼트의 관찰에 따르면 백작은 달걀을 곁들인 베이컨을 즐기며 다양한 종류의 잼들을 먹는다. 바그너를 들으며, 여가시간에 사냥을 한다. 정말 유한 계급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연 중에 독서를 즐기는 자신이야말로 귀족들보다 더 나은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비서의 요청으로 미모의 남작 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전달하면서는 무슨 일장 연설에 가까운 흠모의 언사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게 근원을 알 수 없는 찬사인지 너무 처절한 아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귀족들의 식사를 관찰하는 도중에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토볼트도 초보 하인이기 때문에 귀부인의 드레스에게 겨자 소스를 흘리거나 오래된 찻잔을 박살내는 실수도 저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상급자에게 신속한 보고를 통해, 관대한 조치를 받기도 했다.

 

청년 토볼트는 짧은 하인 생활은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타인을 위한 인내와 복종의 시간들이라는 역경을 극복한 토볼트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를 담보로 한 성장소설의 성격도 <토볼트 이야기>는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토볼트 이야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귀족 계급 사회의 잔영들과 그에 매료된 어느 젊은이의 삶의 그림자를 엿볼 수가 있었다. 다음에는 로베르트 무질의 <세 여인>을 읽을 계획이다.

 

[뱀다리]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동네 새로 생긴 공원에 가서 <토볼트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와 이제 자신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라도 하듯 풀숲에서 울고 있는 풀벌레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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