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5년 만에 다시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다 보니 그 시절에 읽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역시 책은 다시 읽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그 때보다 부수적으로 너튜브란 녀석이 있어서 관련된 여러 정보들도 같이 업그레이드하면서 읽을 수가 있어 좋았던 독서 체험이었다. 다시 읽기와 책 다이어트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나 할까.
조선 역사에서 역모는 변수가 아닌 상수였다. 체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딱 두 번 성공했다. 한 번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그리고 나머지는 이번에 읽은 광해군을 저격한 인조반정이다. 성공하면 반정, 실패하면 역모로 그야말로 집안이 풍지박산나는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일단 이야기는 선조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의 즉위로 중종 이래 치열하게 이어져온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은 사림의 승리로 귀결된다. 사화로 수많은 사림 출신 선비들이 죽어 나갔고, 최종장에서 권력은 사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사림들끼리의 헤게모니 투쟁이 전개된다.
일단 그 부분은 상당히 복잡하니 패스하고, 오늘의 주인공인 광해군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바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이다. 형님 임해군에 이어 선조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난 광해군은 조선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중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군주국가에서 후계자 문제는 가장 중요한 국가 대사 중의 하나였다. 자질이 시원치 않았던 임해군 대신 선조의 선택은 광해군이었다.
왜군이 동래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까지 함락시키자,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몽진길에 오른다. 조선 개국 이래, 수도를 버리고 몽진길에 나선 첫 번째 임금이 바로 선조였다. 그리고 조선 군주 가운데 몽진 삼총사야말로 최악의 군주 트리오로 봐도 될 것 같다. 선조, 인조(총 3회) 그리고 고종이 그들이다. 어쨌든 그렇게 나라가 망할 지도 모르는 위기 가운데, 세자가 된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아마 조선의 군주 가운데, 수도 말고 다른 곳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군주는 광해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나 싶다.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가서 자신의 일신을 위해 명나라 망명까지 시도했지만, 그의 아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사그라져 가는 사직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전쟁 발발 다음해에는 병까지 들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광해군 인생에서 빛나는 1부였다면, 그 다음부터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정비가 없었던 선조는 늘그막에 아들 광해군보다 더 젊은 인목대비를 들이고, 인목대비는 영창군을 낳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장성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전란을 극복해낸 장성한 예비 군주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영창군의 탄생으로 광해군 즉위를 위한 스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선조 말기는 광해군에게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선조가 1608년 3월 16일 사망하면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암투는 광해군이 조선 15대 군주로 즉위하면서 종결됐다. 일단, 광해군은 16년을 기다린 끝에 대권을 손에 쥘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첩첩산중처럼 보였다. 우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 재건 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전쟁으로 실추된 왕권 강화 사업도 필수였다. 마지막으로 중원에서는 명청 교체기라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제적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이란 표현으로 대표되듯 명나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조선 국가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의식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무조건 명나라 편을 들어야 한다는 강상 윤리를 따지며 광해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에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훗날 조선의 기본 조세제도를 도입한다. 기존 공납 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혁신적인 법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국 단위의 전면적인 시행은 아니었고,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한 시범 운영이었다. 어쨌든 중종 대, 조광조와 정광필의 제안으로 그동안 논의만 되어오던 대동법의 시행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치적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다음에는 대규모 궁궐영건 사업과 각종 편찬사업에 착수했다. 임진년 7년 대전란은 조선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그 전란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 신분제를 필두로 해서 그동안 공고하게 지켜져 오던 사회 질서들이 무너져 내렸다. 정통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 아무리 강상 윤리를 따져본들, 당장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전쟁 시기에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어지러워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그리고 전란으로 건강을 해친 이들을 위해 비싼 중국산 약재 대신 토산 약재를 이용할 수 있는 <동의보감>도 펴냈다. 전쟁 와중에 소실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복간하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했다. 그나저나 이런 도서 편찬작업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양반 계층에나 해당되는 일일 텐데, 민생과는 좀 동떨어진 이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은 전란 동안 불에 타고 무너져 버린 궁궐을 영건해서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노력했다. 전쟁 복구가 우선이라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는 궁궐 영건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자고로, 이런 대규모 토목사업은 가능하면 치세 기간 내에 자제하는 게 권력자의 기본이 아닌가. 그것도 전쟁으로 입은 피해들이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대단위 궁궐 영건사업은 아무리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광해군 폐위 이유로 들었던 이른바 폐모살제의 근원이 되는 계축옥사(1613년 광해군 5년)로 결국 나이 어린 영창군은 폐위되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광해군 집권기를 대표하는 북인의 영수는 임진왜란 의병 출신 정인홍과 훈구파 출신 이이첨이었다. 광해군 집권 초기에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고,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서인 출신 정치인들도 등용하는 연립정권을 출발시켰지만, 광해군 후반으로 갈수록 이이첨을 필두로 한 북인들이 정권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들에게 좀 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주었더라면, 과연 인조반정을 막을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평전 <광해군>의 상당 부분은 결국 외교의 달인으로서의 광해군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는 건주-해서-야인 여진족으로 나뉘어져 있던 무리들을 통합하면서, 서방의 명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에게 왜군과 싸울 기마병을 파견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건국 이래 여진족을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던 조선에게는 있을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명나라에 철저하게 신속하던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점점 세력을 키워 가면서, 대국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만력제 이래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자력으로 동방에서 발흥하는 누르하치의 후금을 상대할 수 없게 되자, 재조지은을 이유로 조선에 대후금과의 전쟁에 파병할 것을 요구한다. 그동안의 냉철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지만, 중화중심의 화이관에 사로잡힌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부모의 나라을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며 파병할 것을 강력하게 광해군에게 주청한다. 오늘날에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재조지은의 의리와 신료들의 주장 앞에 더 이상의 시간끌기 전술이 먹혀들지 않자 결국 광해군은 파병을 결정한다. 그리고 애써 기른 5천명의 조총수들을 비롯한 만여명의 병사들을 차출해서 이른바 심하전투에 파병한다. 이 때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가능하면 명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면서 만주 지역에서 융통성 있는 작전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과연 현지에서 그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심하전투는 처음부터 조선군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우선 자국 영토가 아닌 타국의 영토에서 싸우게 되어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오랜 행군으로 전투지에 도달해서는 이미 병사들이 지쳐 버린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원활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버렸다. 무엇보다 주력군이 되어야 하는 명군은 수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동방의 오랑캐 누르하치에게 한수 가르쳐 준다는 생각으로 2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해서 여진족 무리를 일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그동안의 전쟁으로 단련된 누르하치의 후금군을 너무 얕봤다. 게다가 만주 팔기로 알려진 이른바 철기대는 어중이떠중이 끌어 모은 명나라 기마병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총사령관인 요동경략 양호 아래 편성된 명나라 일선지휘관들은 서로 전공을 세우기에 바빠 실제 전투에서 상호 간에 도무지 협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버일러로 임명된 누르하치의 아들들인 다이샨과 홍타이지 등이 주력이 된 후금군의 기습으로 모조리 격파되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 역시 3만의 후금군의 맹공 앞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를 예상한 광해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파병군의 패전은 조선에 재앙이었다. 파병군의 절반이 현장에서 전사했고, 나머지는 노동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후금의 포로로 끌려갔다. 남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절절한 심정이 시가로 남아 있다.
심하전투에 명나라의 강권과 조정 신료들의 열화와 같은 주장으로 파병하긴 했지만, 결국 광해군의 예측이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요동 반도 전체가 만주족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른바 요민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천조국 사람들을 냉정하게 대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낭패였다. 게다가 가도에 요동에서 패퇴한 모문룡이 실지회복을 주장하면서 주저 앉게 되면서 조선의 입장은 더욱 난감해졌다. 밀수업자에 가까운 깡패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물자를 요구하고, 명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하면서 요동반도를 수복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후금과 내통까지 했다. 결국 명나라의 마지막 충신 원숭환에게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또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심하전투가 발생했던 1619년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원숭환은 산해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후계자 홍타이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천혜의 요새라는 산해관이 뚫리면 북경 역시 순식간에 함락될 지도 몰랐다. 원숭환은 산해관 서쪽에 영원성을 건축해서 산해관 이전에 후금을 저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626년 최신무기인 홍이포로 방비가 업그레이드된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군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런 명나라의 충신 원숭환 혼자만의 노력으로 국운이 쇠하는 명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광해군은 명청교체기라는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전문가였다. 정보전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광해군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을 통해, 후금의 내부 사정을 비밀리에 보고받았다. 동시에 조선 내부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도 철저하게 막았다. 이게 바로 외교의 기본이 아니던가.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상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동안, 인조반정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평산부사 이귀가 중심이 되어 광해군이 최근에 다시 기용한 김류와 최명길 등의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역모가 진행되었다. 1623년 3월 즈음해서 이들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파악한 조정의 신료들이 이귀 일당을 잡아들여 국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광해군의 움직임보다 반정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무엇보다 국왕의 친위대 역할을 맡은 훈련대장이 반정군에 붙으면서 광해군은 결국 몰락해 버렸다.
그렇게 광해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그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던 북인들은 일거에 숙청되었다. 광해군 시절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던 정인홍을 필두로 해서 이이첨 일당이 바로 처형되었다. 친명배금 정책을 이행하겠다고 나선 서인 반정정권이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광해군이 조심스럽게 추진해온 줄타기 외교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명나라의 반정 추인을 받기 위해 노력을 하는 동시에 명나라와 후금 모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문제는 인조 정권의 대세가 척화로 흐르면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광해군식 외교가 빛나던 17세기 초반의 조선의 상황과 미중 무역대결의 여파로 관세협상의 파고가 몰아붙이는 현재의 상황이 묘하게 겹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파의 무력 쿠데타로 비록 정권을 잃긴 했지만, 광해군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외교에서 사술도 마다하지 않는 군주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재조지은’ 같은 명분보다 현재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게 바로 민생을 해결하고 국가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