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히 스레드에서 누군가 비페이위의 <위미>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피드를 읽었다. 그러니까 재밌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포스팅을 잘했다는 뜻이겠지. 리스펙트! 중고서점에 마침 없어서 일단 비페이위 작가의 소설집 <청의>부터 사다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나중에 읽기 시작한 <위미>가 추월해 버렸다. <청의>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다. 아마 다음 달에 읽어야지 싶다. 다행히 5월초에 쉬는 날들이 많으니 그 때 한 번 달려 보자.
중국어로 옥수수를 의미한다는 <위미>는 확실히 재밌다. 시골 마을 지부 서기(지서) 왕롄팡과 스구이팡은 무려 8명의 자식들을 줄줄이 낳았다. 문제는 1호부터 7호까지 모두 여자였다는 점이다. 아니 중국이 한 때 산아제한을 하지 않았던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71년에는 아마 엄격한 산아제한이 시행되기 전이었나 보다.
어쨌든 십수년에 걸쳐 아이를 낳던 스구이팡 아줌마는 8번째로 아들 바즈 홍빙을 낳으면서 오랜 숙원을 끝낼 수가 있었다. 왜 우리나라 드라마에 나오던 귀남이 생각이 나는 거지.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로 새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지긋지긋한 남존여비 사상을 혁명적으로 축출하지 못한 모양이다.
지서 왕롄팡은 아내가 아들을 낳기 위해 죽기살기로 고생하는 동안, 넘쳐나는 자신의 바람기를 주체하고 못하고 마을의 거의 모든 아낙네들과 정분을 통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의 첫 번째 주인공이자 왕씨 집안의 장녀 위미가 등장할 차례다. 역시나 무려 7명의 동생들을 거느린 장녀답게 뛰어난 지도력과 명민한 지혜가 빛나는 선수다. 막내 홍빙을 마치 자신의 자식 거두듯이 업고 다니면서, 엄마 스구이팡의 연적들에게 매서운 눈초리 공격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 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도전하는 셋째이자 미녀 위슈를 찍어 누른다. 이들의 치명적인 라이벌 관계는 두 번째 챕터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혼기가 찬 위미는 해방군 조종사 펑궈량과 약혼을 하고 앞으로 인생에서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버지 왕롄팡의 바람기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해방군 전사의 아내와의 불륜이 공개되면서 지서 자리를 박탈당하고, 보통의 농민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동시에 위미는 펑궈량과 파혼하게 되고 동생들(위슈와 위예)이 어느 날 인근 주민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게 되면서 집안은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나버렸다.
이에 위미는 권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왕씨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위미는 자원해서 나이도 많고, 아내가 병환으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당간부 궈자싱의 후처로 들어간다.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 마을을 떠나 진으로 향하는 위미의 모습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 이제 문제적 인물은 위슈가 등장할 차례다. 위미가 결혼해서 떠나고 난 뒤, 다른 자매들과 티격태격하다가 상대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자 도저히 고향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없었던 위슈는 결국 진으로 떠난 언니 위미에게 의탁하고자 고향을 떠난다.
위미와 위슈 자매의 대결은 공간을 옮겨 새로운 무대에서 펼쳐진다. 언니 위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도전장을 들이대는 위슈가 얄미우면서도 또 동시에 혈연이라는 이유로 내칠 수가 없는 그런 지경이다. 남편 궈자싱에게 베갯머리송사로 위슈를 저울원 자리에 꽂아 넣는데 성공한다. 그전에 궈자싱 전처의 딸인 차오차오를 두고 왕씨 자매 간에 한판 대결이 있었던가. 이 둘의 대결과 갈등은 소설 <위미>를 정말 재밌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남도 아닌 자매가 펼치는 치열한 복마전을 보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위슈가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니 위미에게 도전해도,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위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언니에게 굴복하고 복종의 단맛을 보기 시작하는 위슈. 문제는 차오차오의 오빠 궈자오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사랑과 전쟁이 시작된다.
궈주어에게 위슈는 이모뻘이지만, 나이는 위슈가 궈주어보다 어렸다. 보는 순간부터 불꽃이 튄 두 남녀의 격정적 사랑이 이제 막 시작될 판이다. 위기를 직감한 위미는 자신의 의붓아들 궈주어에게 위슈가 예전에 당한 끔찍한 사건을 알려준다. 이것으로 궈주어와 위슈 간의 격정이 사그라들면 좋았겠지만 사건을 위미가 의도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버렸다. 위슈는 궈주어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역시 궈자싱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위미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해가면서 그야말로 위슈는 생지옥 같은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팜므 파탈 같은 위슈의 도화살을 위미가 비난하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위슈의 갑작스러운 출산으로 2부가 마무리된다.
자 이제 3부의 주인공이자 왕씨 집안의 막냇딸 위양이 등장할 차례다. 위양은 다른 언니들과 달리 정말 특별할 게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뛰어난 암기력을 바탕으로 해서 사범대학에 진학하는 놀라운 학업적 위업을 달성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위양의 이야기들은 위미나 위슈의 그것에 비해 심심한 소고기뭇국을 먹는 맛이랄까. 물론 왕씨 집안 자매 서사의 연장선에 서 있긴 하지만 굳이 추가될 이유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11년이 지난 1982년 그러니까 개혁개방의 시절, 사범대 내부에서 펼쳐지는 공작과 비방 그리고 시기의 이야기들은 1부나 2부의 사회주의 에로티시즘을 다룬 이야기에 비해 내공이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위양이 사범대의 시인 추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그가 시원하게 내지른 오줌발을 보고 나서 천하의 양아치였다고 판단하고 정을 거두는 장면이 얼마나 웃기던지.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이 결국은 착시나 주관적 착각이 아닐까 싶어졌다. 이른바 눈에 씌웠던 콩깍지가 벗어지는 순간, 현실을 아주 냉정하게 다가오는 법이니까. 세상에 호남자였던 추톈이 순식간에 광인으로 몰려 위병대 청년들에게 제압당하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서술은 압권이었다.
3부가 별로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가만 되짚어 보니 정말 웃긴 장면들은 3부에서 죄다 등장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적 사고를 강조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운운해도, 그곳 역시 남녀상열지사나 이기주의가 넘실대는 욕망의 바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체제가 인민들이 살아가는 형식을 강제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의식구조와 행동방식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 <위미>를 읽으면서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가뿐하게 <위미>를 만났으니, 다음 타자로 읽다만 <청의> 더불어 오래 전에 수배해 두었지만 여적 읽을 생각조차 안하고 있던 <마사지사>도 읽어야겠다. 그리고 시간 여유가 더 있다면 <들판>까지 읽으면 비페이위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