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sweeter than day before
  •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
  • 굽시니스트
  • 17,820원 (10%990)
  • 2024-12-04
  • : 3,451


잊을만 하면 나오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가 이제 대망의 완결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시리즈 만화의 근본을 지키기 위해 20권을 마무리할 거라는 단호한 의지를 19편에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거의 5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을 제공한다. 이거 쉽지 않은데 그래.

 

어제 도서관에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책을 빌리러 갔다가 문득 이 시리즈 생각이 났고, 출간된 지 4개월이 지나니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냉큼 빌려다 읽다 잠이 들어 버렸다. 아 달콤한 낮잠이여.

 

일단 중국 청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의화단 사태의 마무리로 시작한다. 8개국 연합군의 무력은 청나라의 그것을 압도해 버렸고, 청나라는 당장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의화단 사태로 청나라는 거의 서강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열강이 원하는 조차지들을 내주면서 국가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19세기 내내 전 세계에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영국의 결정이 청나라의 존속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태를 계기로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했고, 철도 부설을 비롯한 막대한 투자로 만주를 거의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게 됐다. 이에 영국은 극동에서 러시아를 저지할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존재가 된 청나라는 답이 없어 보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차르의 신임을 얻은 사업가 출신의 정치가 베조브라조프는 만주를 넘어 한반도에서 일본을 저지한다는 신박한 플랜을 계획했다. 만주 확보를 위해 만주가 아닌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의 대륙 진출을 차단하겠다는 설정이었다. 1901년 <압록강 목재회사>를 설립해서 한반도 북부의 임업권을 차지한 베조브라조프는 압록강 유역 곳곳에 임업기지를 가장한 군사기지를 세우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일동맹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결국 만주에서 철병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 구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했고, 미국은 지는 편인 러시아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만주와 한반도를 집어 삼킨 일본은 반드시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예언은 태평양전쟁으로 현실화되었다.

 

일본 헌정회 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패스. 그리고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재수의 난도 흥미로운 지점이 없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한 번 공부해볼 지점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병인양요 당시와 달리 프랑스인들이 죽거나 그러지 않았고, 본국 프랑스에서 정교분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점 정도. 러일 대결의 막판은 러시아가 용암포를 조차하면서 양국간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최절정기였던 20세기 초, 러시아나 일본 모두 자주국이었던 조선과 청나라의 의사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만환 교환론 같은 철저하게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으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신생 제국 일본의 고민은 자신들에 비해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월등한 러시아와 싸워서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였다.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당연히 싸우지 않고, 교섭으로 최선을 도모하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잠깐 간도 관리사로 북간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이범윤이 등장한다. 오래 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두만강(혹은 토문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한다는 합의는 청나라의 힘이 빠지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이용익의 지원을 받는 이범윤의 민병대가 간도 지역을 사실상 장악했다고 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앞서 일단 청나라와 조선 양국의 중립을 확인한다. 10년 전의 청일전쟁에서 꿀을 빨았던 일본의 조야는 이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최소한 비용으로 엄청난 영토할양과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꿈꾸면서 다시 한 번 전쟁이라는 도박판에 뛰어 들게 된다. 얼추 비슷한 실력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상대로 일본 연합함대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의 서막은 시작되고,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정식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이익선으로 설정하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만주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대신 북위 39선을 기준으로 해서 비무장지대를 설정한 것을 주장했다.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던 일본에게 러시아의 제안은 바로 묵살당했다. 압록강을 DMZ로 삼자는 일본의 주장 역시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교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폭력적 방법이 동원될 차례다.

 

개전 13일 뒤인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조선을 사실상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서 신속하게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 뤼순항과 봉천의 러시아군 주력을 격멸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겼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은 유럽에서 단선철도를 통해 병력과 보급을 받아야 하는 러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초전부터 승기를 잡아 가기 시작한다.

 

수차례에 걸친 일본 연합함대의 뤼순항 폐색작전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동안, 일본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목표인 봉천의 러시아군 주력을 잡기 위해 쾌속의 진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이 사령관을 맡은 뤼순 방면 3군은 콘트리트 벙커와 기관총으로 곳곳에 요새화된 러시아군 진지를 상대로 무모한 육탄돌격을 반복하면서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일본 연합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러시아의 최강 발틱 함대가 마침내 출발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전쟁이 장기전이 될수록 일본에게 불리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일본 국가 예산을 초과할 정도의 막대한 전비 부담 때문에라도 일본은 신속하게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의 러시아군을 격멸해야만 했기 때문에, 노기 사령관의 무모한 돌격이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설상가상으로 극동에서 전쟁을 담당하던 러시아군 수뇌부 간의 비협조적 태도도 심각한 문제를 유발했다. 지상전에서 충분히 유리한 지형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군의 진격을 돈좌시키고 요격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음에도 스스로 전선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능한 제독과 장군들이 어이 없이 전장에서 사건 사고로 전사하는 등 사기면에서도 많은 패착을 보여 주었다. 굽시니스트 작가의 만화/글을 보다 보면 러일전쟁은 누가누가 잘 싸우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상대적으로 덜 삽질을 하느냐가 관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착된 뤼순항 전투와 봉천에서 많은 수의 일본군 전상자들의 수치가 치솟으면서 일본 국내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 제독과 특히 노기 마레스케에 대한 비판은 하늘을 찌를 판이었다. 하지만 노기의 장남 노기 가츠스케(남산전투, 복부관통상)와 차남 야스스케(203고지 전투)가 모두 러일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잠잠해졌다고 하던가.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이 1905년 정월에 뤼순항을 점령하는 것으로 19권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그전인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의정서>가 조인되면서 조선의 망국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굽시니스트 작가는 러일전쟁에 앞서, 조선이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 편에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상상을 가정해 본다. 그랬더라면 조선의 망국이 좀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쟁 통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게 되지 않았을까.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고종의 중립 선언으로 국가 조선의 수명은 몇 년 더 유예되었을 뿐이었다. 의화단 사태로 청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세계제국 영국의 존속 결정으로 겨우 10년 더 유지되었을 뿐이다. 마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처럼 강력한 서구 열강이라는 태풍 앞에 약소국의 운명은 촛불과도 같지 않았나 보다.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편을 보면서, 예전에 너튜브를 통해 시청한 <러일전쟁> 시리즈와 전쟁을 다룬 일본 영화 리뷰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3고지를 향해 일본 결사대라는 백의대가 돌격하고, 러시아군 진지에서 기뢰 폭탄을 굴리는 장면이 바로 연상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과달카날에서 미해병대를 향해 무모한 야습을 감행하던 일본군의 모습이 38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다음 마지막 20편에서는 1910년까지 6년간의 역사를 다룰 예정이라고 하는데, 600쪽을 훨씬 넘기는 대작이 출현할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100년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어지럽고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질서가 빚어내는 격랑의 역사가 그 시절과 중첩되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이려나.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