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에는 왜 이렇게 책 읽기가 지지부진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복잡한 시국 탓이 아니었을까. 설상가상으로 트럼프가 촉발한 관세전쟁으로 환율까지 치솟고, 실물경기는 계속해서 추락 중이고 뭐 그렇다.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여름이 온 것처럼 더웠다가 눈에 우박까지 내리니 말 다했지.
그래도 지난주에 중고서점에 들러서 가브리엘 루아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 <세상 끝의 정원>을 구해서 읽었다. 아쉽게도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은 책이라 중고책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책들은 점점 더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도 중고서점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려나.
가브리엘 루아는 프랑스계 캐나다 작가로 매니토바주 위니펙 부근의 생보니파스 출신이다. 사진을 찍을 때, 턱을 괴는 모습을 반드시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진짜 생전의 사진들을 보니 그런 설정이더라. 놀랍군 그래.
<세상 끝의 정원>은 표제작을 포함한 네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소설집이다. 이민자들의 나라는 이웃한 미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집을 읽고 나니 캐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첫 번째 작품인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에서는 중국 출신의 쿨리 삼리웡이 캐나다 호라이즌(지평선)에 이민와서 조촐한 식당을 차리고 살아가는 단출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식당은 반드시 필요한 그런 장소일 것이다. 삼리웡은 이민자 지원 협회에서 빌린 돈으로 호라이즌에 테이블 네 개 짜리 식당을 차리고 손님들을 받는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지평선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는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역 만리 캐나다에서 살지만 결국 그는 조상들의 땅에 가서 묻히길 원했던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다음, 삼리웡은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지평선 마을 사람들의 환송연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아 그리고 석유 시추로 호황을 맞게 된 지평선 마을에서의 삼리웡의 식당 영업을 역효과를 발생시켰다. 결국 당국의 위생검사 직격탄을 맞고, 또 새로운 스타일의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삼리웡은 정든 지평선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나그네 길에 다시 나선 삼리웡은 지평선 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은 마을에서 새출발을 예고한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대로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말이 참 와닿는 그런 사연이었다.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는 캐나다 오지 마을에 사촌 행세를 하며 찾아든 어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는 이웃은 물론이고, 친척들과도 자주 왕래를 하지 않게 핵가족 시대에는 정말 낯설게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잘 모르는 친척이라며 누군가 찾아와 얼마간 숙식을 부탁한다면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아니 그전에 철저하게 신원 조회부터 하려고 하지 않을까. 사실 너무 오랫동안 왕래를 하지 않아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얼마 전, 친척분 장례식에 가서 본 분들이 내게는 그랬다.
아버지는 예의 친척을 호의로 수용하지만, 어머니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입장이 역전된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행적을 보인 나그네는 가정의 진짜 실력자에게 환심을 사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가브리엘 루아 작가의 청년기가 대충 100여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두 골짜기>는 정든 고향 우크라이나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기 위해 여기저기 임장을 하러 다니는 일단의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행정관들은 그들에게 정말 좋은 땅을 구해주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가능하면 자신들이 살던 곳과 비슷한 그런 곳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우두 골짜기>였다. 정부 관리는 결사적으로 그곳을 적합한 땅이 아니니 더 나은 곳을 수배해 주겠다고 하지만, 그들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가 없다.
문득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고향에서 가져온 관습이나 풍습을 모두 재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언어부터 배워야 한다. 아마 어쩌면 첫 세대는 불가능한 그런 미션일 지도 모르겠다. 우두 골짜기의 척박함이야말로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에게는 정말 익숙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다시 난민의 시대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고단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1975년에 발표된 <세상 끝의 정원>이 역시 소설집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죽어 무덤에 누은 마르타 여사에 대한 이야기. 마르타와 그녀의 남편 스테판은 폴란드 출신 이민자들이다. 이미 자동차가 굴러 다니는 세상이지만, 그들의 세계에는 여전히 수레가 공존한다. 가뭄을 피해 고향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가뭄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마르타와 스테판을 괴롭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마르타가 노구를 이끌고 가뭄에 그 좋아하는 꽃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물을 퍼 나르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행동들을 하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남편 스테판도 아내 마르타의 그런 행동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 중에 그런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장성해서 마르타와 스테판의 곁을 떠나는 세 자녀들은 완전한 캐나다 사람들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자식들의 부재가 아쉽긴 하지만, 그 또한 이민자들의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간주하고 마르타와 스테판은 받아들인다. 무료해 보이는 부부의 일상을 관찰하듯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가브리엘 루아 작가의 서사는 심심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을 품고 있다.
가브리엘 루아의 <세상 끝의 정원>은 무려 21년 전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바깥의 소설> 시리즈였다. 낡은 책의 타인의 장서인까지 찍힌 빛바랜 책을 읽으면서 왠지 20세기 캐나다의 어느 이민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조금 들었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느꼈던 삶의 무게는 지금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