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sweeter than day before
  • 면도날
  • 서머싯 몸
  • 11,700원 (10%650)
  • 2009-06-30
  • : 30,791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중고서점에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 뜨길 기다렸다. 심지어 당근도 뒤졌다고 하지. 이 책은 빌려서 읽기보다는 아무래도 왠지 소장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눈과 우박이 쏟아지던 지난 토요일, 드디어 중고서점에 <면도날>이 나왔다는 뉴스를 들고 냉큼 달려가서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건 뭐 중고책이 아니라 한 번 넘기지도 않은 새책인 걸 그래. 500쪽 짜리 책이었는데 단 이틀만에 다 읽었다. 재미와 주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수작이었다. 이런 맛에 고전을 읽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면도날>은 1919년에 <달과 6펜스>라는 걸작 소설을 발표한 어느 작가(아마 서머싯 몸의 페르소나겠지)가 화자로 등장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삶들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오십대 중년 엘리엇 템플턴이다. 미술품과 골동품 거래로 돈을 벌기 시작한 엘리엇은 지독한 속물대장이다. 자신의 재력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판으로 삼아 사교계에 진출한다. 그리고 곧이어 사교계의 스타가 되어, 각종 파티를 열어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또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사업과 인맥을 확장하고 구축해 나간다.

 

엘리엇의 조카딸 이사벨 브래들리는 이제 막 유럽의 전장에서 돌아온 고아 출신 래리(로렌스) 더렐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하지만, 나이를 속이고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전장에서 자신을 구하려던 동료 팻시의 죽음을 보고서 심각한 트라우마에 빠진 상태다. 이제 막 전쟁에서 벗어나 세계 제국으로 성장해 가던 시절의 미국 청년에게 주어진 기회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래리의 생각은 달랐다. 너무 이른 시기에 삶의 고된 맛을 봐서였을까? 아니면 조실부모하고 후견인에 의해 양육되면서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탓일까? 당장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자는 이사벨의 제안을 거부하고 유럽 대륙의 파리로 건너가 한동안 공부를 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부터 래리와 이사벨의 관계는 파탄을 예고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사벨에게는 백만장자 출신 헨리(밥) 매튜린의 아들 그레이가 열렬하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사실 모든 조건에서 래리보다 그레이가 월등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레이와 래리는 친구 사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레이는 아버지 헨리를 설득해서 래리를 아버지 회사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이사벨은 왜 래리가 이런 좋은 제안을 마다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래리는 파리로 떠나 자유로운 보헤미안으로서 2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심지어 그리스어까지 배우는 지식에 대한 열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것처럼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고 보다 더 많은 배움을 추구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미국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외자(expatriate)이자 전형적인 몽상가 혹은 이상주의자의 모습이 보여진다.

 

더 이상 래리의 학문과 배움의 외도(?)를 견딜 수 없었던 이사벨은 파리로 건너가 래리와 결혼 문제를 두고 담판을 짓는다. 아니 이 갈등은 시작하기 전부터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나. 래리는 학문의 구도자 같은 자신의 배움의 길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은 고작 1년에 3,000달러 수입으로 만족하며 사는 래리의 삶을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고향 시카고로 돌아가게 되면, 안정적 직업과 더 많은 수입으로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런 호사를 거부하냐는 주장이다. 여기서 바로 나는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격렬한 충돌을 볼 수가 있었다. 도무지 타협이 불가능한 두 세계가 맞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결말은 예상한 그래도였다. 이사벨은 약혼을 취소하고, 시카고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 매튜린과 결혼에 골인한다.

 

이사벨이 시카고에서 부잣집 도련님과 신혼살림을 차린 동안, 우리의 주인공 래리의 방랑은 계속된다. 화자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후 이십년 동안의 시절을 오가며 서로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다. 이 점 또한 작가가 설계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실 소설 <면도날>에는 래리와 이사벨의 이야기 뿐 아니라 엘리엇이나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등장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번 독서에서는 래리와 이사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읽었다고 고백한다.

 

래리는 파리를 떠나 이번에는 프랑스의 랑스 지역에 가서 탄광노동자로 변신한다. 골방에서 책만 읽던 샌님이 어떻게 노동이 강하기로 유명한 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게 되었을까. 어쩌면 작가 서머싯 몸은 지식인들이 그런 빡센 노동도 한 번 쯤은 경험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다음에는 우연히 만난 폴란드 귀족 출신 코스티를 만나 함께 독일 농장 노동자가 되어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주인공 래리 더렐은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 어쩌면 남다른 실력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이고, 전쟁 영웅으로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가 있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공부했고, 독일 농장 경험을 통해 독일어도 배웠다. 나중에 나오지만, 래리의 유랑은 인도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거기서는 타밀어를 배워 구루들과 교류하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천재적 수준의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독일 농가 여주인과의 관계 때문에 코스티와 이별한 래리는 이번에는 철학의 나라 독일 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우연히 만난 베네딕트 수도회 출신의 엔스하임 사제를 따라 수도원 생활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라, 갑자기 래리가 추구하는 구도의 길을 되짚어 보다 보니 문득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게 소설과 후대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상호 작용을 했던 걸까.

 

래리의 다음 목적지는 인도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의 간판원으로 변신했던 래리는 인도 봄베이에서 불현듯 하선해서 저명한 인도의 구루를 찾아 나선다. 독일 수도원에서 신과의 조우를 잠시 경험했던 래리는 인도에서 절대자와의 합일까지 경험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포레스트 검프 이전에 이미 래리 더렐이라는 걸출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엑스페이트리어트(국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조금 전율하기도 했다.

 

자 그렇다면 다른 주요 인물인 이사벨 브래들리 아니 이제 그레이와 결혼했으니 이사벨 매튜린에게 시선을 돌려 보자. 모두가 다 알다시피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929년 10월 24일 증시 폭락으로 매튜린네 집안은 폭삭 망해 파산해 버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사벨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구원자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파리 사교계의 이단아 엘리엇 템플턴이었다.

 

엘리엇을 파산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그전부터 교류하던 바티칸의 뛰어난 정보력이었다. 미국 주식이 폭락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엘리엇은 밥 매튜린이 관리하던 자신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고 안전 자산인 금으로 바꿔, 위기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은 누이 루이자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뼈 속까지 속물이긴 했지만, 사람 좋은 엘리엇은 조카 이사벨네 가족을 외면하지 않고 파리로 불러 들여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이사벨 가족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한편, 오랜 방랑 끝에 파리로 돌아온 래리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동향 출신 소피 맥더널드를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여전히 래리를 사랑하고 있던 이사벨은 도저히 술과 마약으로 엉망이 된 소피와 자신의 옛 연인이 결혼하는 걸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화자에 의해 드러나게 되지만, 이사벨은 최악의 방법으로 소피와 래리의 결합을 방해하는데 성공한다.

 

서머싯 몸은 <면도날>에서 화자이자 작가로 등장해서 소설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서사를 주도한다. 아마 그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독자들은 서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으리라.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몸은 방대한 서사를 통해 전달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며 사는 걸까? 래리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그리스 원어로 읽을 때 너무 기뻤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래리처럼 책에서 그런 위안과 구원을 기대하며 살지 않나 싶었다.

 

이사벨에게서는 타협의 미학에 대해 배웠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다. 래리를 사랑했지만, 래리의 이상을 공유할 수 없었던 또다른 속물이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은 래리와 함께 하는 고난의 행군 대신 부유한 가문 출신의 호남자 그레이를 선택해서 결혼이라는 선택을 했다. 물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로 집안이 박살나기는 했지만 그레이는 래리와 달리 여전히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험난한 시기를 버텨 나갔다. 그리고 엘리엇 삼촌이 죽고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텍사스 댈러스에 가서 석유 사업을 시작한다. 아마 이사벨 가족들은 그곳에서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서머싯 몸의 <면도날>은 고전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는 통념을 제대로 혁파해준 그런 멋진 작품이었다.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구도의 길에 나섰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길 위에서 과연 깨우쳤는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알 수가 없지만, 그의 방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출발할 때에는 부모가 남긴 유산이 많은 도움이 됐지만, 어느 순간 래리는 그마저도 포기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뉴욕에 가서 택시를 운전하면서 먹고 살면서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을 가지겠다는 선언 앞에서는 끝까지 자신의 몽상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래리가 1970년대, 뉴욕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 드라이버" 트래비스 리로 변신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도 해봤다.

 

왜 이런 걸작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와 더불어 올해 만난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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