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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er than day before
  • 목욕탕
  • 다와다 요코
  • 12,600원 (10%700)
  • 2023-05-10
  • : 1,456


 

스레드를 통해 다와다 요코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리고 검색해 보니 제법 책들이 나와 있네. 그리고 일본 출신의 다와다 요코 작가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나서, 독일로 건너가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그리고 이중언어자로서 현재 베를린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어제 당장 근처 도서관으로 달려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목욕탕>을 빌렸다. 어라, 분량이 꼴랑 100쪽 밖에 안되네 그래. 그런데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읽고 나서 바로 한숨이 나왔다.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쓴다니 그래.

 

사실 일본어도 그리고 독일어도 못하는 일개 독자로서의 다와다 요코 작가의 이중언어자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다. 번역된 한국어 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작가와는 첫 만남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내가 느낀 점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지 싶다. 소설의 화자는 혀를 잃은 동시통역사라고 한다. 그게 가능한가?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형태를 바꾸는 모양이다. 나는 계속해서 화자가 잃었다는 혀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모국어 대신, 타국에서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란 무엇일까. 간단한 의사소통까지는 몰라도 작가처럼 글을 쓴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계속해서 소설에 등장하는 "비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나의 생각들은 다와다 요코 작가가 구사하는 문자들을 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게 아닌가 싶다. 1960년생으로 전후 세대인 작가의 어머니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인가 보다. 그 세대의 전쟁 트라우마의 흔적을 살짝 내치비기도 한다.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자식을 위해 비늘에 둘러 인 채 암석을 부수다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했던가. 부모는 자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진부한 해석이 맞나 싶기도 하고. 다와다 작가의 기묘한 서사를 접하면서, 자식이 나와는 다른 별개의 독립된 객체라는 사실을 나는 과연 인정할 수 있을까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식과 적당한 거리두기가 과연 가능할까.

 

처음에는 사진사인 줄 알았던 크산더가 독일어 선생이었다가, 나중에 다시 목수라고 말하는 화자의 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리 인간은 어떤 하나로 정의되기를 거부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독서가인 동시에 사진사이기도 하고 뭐 다른 무엇으로 불릴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빛의 유희를 즐기는 사진사이고 싶다. 나중에 누군가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그렇게 "빛의 유희"라는 구절만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동시통역사였다가 혀를 상실한 화자는 다시 타이피스트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어쩌면 그것도 매력적인 직업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혀를 상실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방인으로서 독일어 구사에 대한 자신 없음 혹은 동조의 기능 상실을 의미하는 걸까? 이 짧은 소설을 접하면서 너무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에게 이런 점들을 묻는다면 정말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을까 과연. 책을 읽는 내내 삶은 고구마를 삼킨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고 고백한다. 옮긴이기 말미에 단 해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역시 독서는 주관적인 것인가 보다. 참, 목욕탕은 단 한 번도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말구.


[뱀다리] 소설의 어딘가에서 만난 "석관"의 이미지는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 <노스페라투>의 올록 백작의 안식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보니 쥐떼에 대한 언급도 있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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