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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머네인. 정말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호주 출신으로 고로크라는 곳에서 거의 은둔자의 삶을 사는 그런 작가란다. 그런데,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고. 이런 마케팅이라면 또 책을 사서 보지 않을 수가 없지. 작년 가을에 산 책을, 을사년 소한 강추위가 불어닥친 와중에 다 읽었다.
호주 대륙의 "평원"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한 작가는 평원의 모처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도움을 줄 대지주, 후원자를 기다린다. 아티스트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고대 로마에서 발원한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모양이다. 하긴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도 메디치 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그런 걸작들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싶지만.
제럴드 머네인 작가는 거대한 평원이라는 이미지가 부여하는 풍경에 집착한다. 아니 소설 <평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모호하고 정의할 수 없는 평원의 풍경에 경도된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후원자가 될 대지주들이 노골적인 예술가들의 평원 찬양을 환영하는 것도 아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그런 선수들을 원한다.
후원자인 대지주들과 화자로 대변되는 예술가들 간의 시소 게임을 보다가 문득 어려서 호주 배낭여행을 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들에게 산은 세모꼴의 무엇이 아닌 그냥 지평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산은 거대하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가려면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48시간을 달려야 했지. 그래서 장거리 버스에는 운전사 양반들이 두 명 타고 있었다. 휴게소에 샤워실이 있는 것도 그 시절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던 석양을 등지고 이름도 모를 어느 휴게소에서 프렌치 프라이와 맥주로 끼니를 때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난 그 때, 장 자크 베넥스의 <베티 블루> 같은 대평원이 품은 황혼의 이미지라며 황홀해 하곤 했었지.
작가가 구사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내러티브를 따라가기가 사실 버겁다. 도대체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내가 읽을 바에 따르면(이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결국 외부인들은 평원인들의 삶을 알 도리가 없다는 걸까. 여기에 시간이라는 개념까지 더해진다면 제럴드 머네인의 서사는 더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지 싶을 정도다.
평원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철저한 외부인인 화자가 평원인들 사이에서 과연 자신들과 동류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한 명의 대지주에게 고용된 "클리엔테스"일 뿐이다. 다만 고대의 종속적인 관계와 달리 조금은 너그럽고 자유로운 상태의 피후견인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풍경에 집착하는 작가의 스타일로 봤을 때, 소설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런 풍경의 일부분으로 보여진다. 후원인의 아내와 딸 그리고 그의 동료 지주들, 평원이라는 어떻게 봐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공간을 채우는 요소라고나 할까. 단언할 수 없는 '시간'이 부여하는 공허함과 기억의 부재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하다고 생각될 법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흐르는 시간으로 구성된 세월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이고.
몇 해 동안이나 대지주의 후원을 받지만, 화자에게 후원인은 어떤 성과를 내라고 특별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가끔 하는 발표도 연례행사 같은 의식으로 다가온다. 물론 화자도 그전의 실패했던 예술가들처럼, 평원의 이미지들을 카메라에 담고 후원인의 딸들을 자신이 구상하는 영화의 엔딩에 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필름이 들지 않은 카메라로 대지주와 가족들의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설사 그런 빛의 흔적들이 남길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나중에 흑백으로 박제된 사진들의 이미지를 보고 무엇을 느낄 수가 있었을까.
어쩌면 사진가가 의도한 이미지들이 자신의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것처럼, 작가의 글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번에 제럴드 머네인의 <평원>을 읽으면서 하게 됐다. 길지 않은 소설을 읽다가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어디에선가 길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 나는 어쩌면 기존의 정통적 서사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제럴드 머네인의 <평원>은 참 쉽지 않은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럴드 머네인의 내러티브가 너무 사변적이어서 내가 소설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기에, 빅토리아 주의 고로크(Goroke)에 산다는 작가는 너무 현지에 최적화된 그런 인물이 아닌가 싶다. <평원> 한 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