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중고서점에서 한 번 사서 볼까 싶던 책이다.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바로 옆 북트럭에 있는 걸 보고는 막 나오는 길에 빌려서 순식간에 다 읽었다. 대중들을 위한 역사 개설 정도의 수준이라 다 읽는데 이틀이 걸렸다. 역사책이 이렇게 읽는 재미가 있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1492년 콜럼부스보다 한참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는 바이킹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문난 깡패 집단인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를 근거로 해서 유럽에 진출했던 모양이다. 바다와 강은 물론이고, 육지에서도 배를 끌고 다녔다는 바이킹들은 바랑기아 용병대로 유럽 영주들에게 고용되어 마치 해병대 같은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이들은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에까지 진출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린란드에 그들이 정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후 상황이 나쁘지 않았지만, 간빙기가 지나고 다시 날이 추워지고 자원이 소모되면서 그린란드 정착지에 있던 바이킹들은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의 일파로 알려진 노르만족이 프랑스 서북부의 노르망디에 거주하게 되면서 유럽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훗날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진 노르망디공 기욤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 쟁탈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아우르는 왕국을 신설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얼마 전에 읽은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도 나오는 마틸다 왕비가 플랜터저넷 왕조의 시조가 되는 헨리 2세의 어머니였단 말이지. 사실 뜬금 없이 1권을 읽고 나서 10권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당대 역사를 모르고 읽다 보니 궁금한 점들이 좀 있었는데, 이번에 주경철 선생의 <중세 유럽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한 점들이 많이 풀리게 됐다. 역시 이래서 책을 읽어야 하는구나 싶다.
누가 뭐래도 중세 유럽을 구성하는 두 가지 축은 봉건제와 교회였다. 이런 이유로, 세속군주와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의 대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내린 파문을 취소해 달라며 눈밭에서 속죄 의식을 거행했다. 결국 교황권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세속에서 권력 투쟁에 성공한 하인리히 4세가 복수전에 나서면서 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이었던 서임권은 교황에게 귀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점 중의 하나는 중세 최고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연옥>이라는 개념이었다. 원래 종래의 기독교 세계관은 구원을 상징하는 천국과 처벌을 상징하는 지옥의 이원적 시스템이었는데, 여기에 중간적인 "연옥"이 추가되었다. 사후 바로 천국에 갈 정도의 선행을 쌓지 않은 이들은 바로 이 연옥에서 수년간의 참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천국에 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훗날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이라며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지만, 정말 신박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청빈과 자본주의 이윤 추구에 대해서도 기독교는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지만, 근대 사회의 주인공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원론이 아닌 각론에서 탄력적인 운영의 묘미를 보여준다. 노동을 통해 마련된 자본이기 때문에, 돈놀이꾼이 추구하는 자본을 통한 이자장사도 가능하다는 그런 논리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그렇다면, 돈놀이꾼이 주무르는 자본이 노력을 통해 얻은 게 아닌 불로소득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결국 과정과 절차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성장에 스토아 철학은 많은 부분에서 기여했다.
가난과 청빈에 대해서도,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프로테스탄트 자본가들은 맹공을 퍼붓는다.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잡아다가 강제 노동을 시켰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붉은색 염료로 사용되는 브라질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혹독한 노동에 빈민과 부랑자들이 동원됐다. 일하지 않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는 강압적 프로파간다의 출발점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었다.
살인을 금하는 기독교 정신도, 이교도와의 전쟁에서는 예외로 간주됐다. "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격문으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으로 결국 성도 예루살렘은 그들의 바람대로 탈환되었다. 서방 세계에 비해 우세했던 동방 무슬림 세력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십자군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십자군 이데올로그들은 이교도와의 전투에 참가한 기독교 전사들이 적과 싸우다 사망하면, 순교자가 되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서 살인은 금하고 있지만, 신앙의 적에 대해서는 예외적이라는 억지논리로 십자군 전쟁의 폭력성을 정당화했다.
세속 권력과 교황권의 투쟁은 결론적으로 근대적 사법 제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가령 예를 들어 신명재판 같이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관습법이나 성문화된 법조항이 필요하게 되었고, 부르주아 근대사회로의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던 시절이 바로 중세였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 아닌가 싶다.
21세기에 메르스와 코로나19가 있었다면 중세에는 흑사병(페스트)라는 팬데믹이 전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선페스트는 교역을 통해 지중해 연안 도시에 상륙했고, 전 유럽인구의 1/3 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설적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인간의 중요성에 집중하게 되었고, 피렌체와 같은 자유도시의 발전 그리고 뒤이은 르네상스 인본주의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됐다.
16세기 대항해시대에 세계를 제패하게 될 서구문명의 도래에 앞서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다는 주경철 선생의 탁월한 빌드업에 경의를 표한다.
[뱀다리] 말미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이야기를 하지 않았네. 21년 전에 로마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만들었다는 첫 번째 피에타 상의 실물을 보고 그만 숨이 멎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작품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젊은 천재의 첫 번째 시도와 두 번째 발디니 피에타 그리고 말년의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보여주는 아우라는 또 달랐다. 대리석 돌 속에서 이런 작품들을 뽑아낼 수 있는 천재 조각가의 실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