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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해러웨이 선언문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사이보그의 현신incarnation은 구원의 역사와 무관하다."  서구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기대고 있는 기원 설화를, 개인의 발달과 역사의 발달이라는 쌍둥이 신화로 구축하고 있는 서사 장치를 건너뛰고 있다. 사이보그는  해러웨이의 아이러니한 믿음의 이해에서 구축된 이미지다.  사이보그는 에덴동산을 모른다. 사이보그는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지도 못한다. "결국 그들에게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 별반 차이는 없는 듯하다."

 올해 다시 해러웨이를 읽으려고 책을 꺼냈다. 모든 동일성이 사라지려고 할 때 차이의 동일시는 내게 상당한 타격을 준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사유가 <있음이라는 길 위를 찾아가는 방법이나 도구>라면, 사이보그라는 사유는 무엇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영영 궁금한 문제다. 이걸 납득할 때까지 해러웨이를 읽어보겠다.




"나는 윤리적 채식주의가 필요한 진실을 체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가 갖는 극단적인 잔인성에 대한 결정적 증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리가 인간예외주의의 근거가 되는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양육하기와 죽이기를 필멸의 운명을 진 반려종 얽힘의 불가피한 일부로서 대면하게 하는 명령인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수종 공동의 번영은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진실들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 4장 검증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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