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은 언젠가 이상하게 단절되었듯
그렇게 이유 없이 돌아왔다.
나는 그때, 그 여름날, 그 시각처럼
그 옛날의 거리에 있다. (490쪽, 해명)
이 책의 말미에는 유리 지바고의 시가 담겨져 있다. 수호 천사 같은 인물의 등장, 우연의 남발, 확 건너뛰어 버리는 뜬금없는 전개 등으로 소설적 맥락이 많이 부족한 작품이지만 이 시로 말미암아 시인이 쓴 소설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닥터 지바고』는 내용과 작품성을 떠나 작가와 노벨상 간의 스캔들로 유명해진 작품이다. 1957년 작품이 이탈리아에서 출판되고 195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자 소비에트 작가 동맹은 사회주의 혁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작가 동맹에서 제명 시키고 정치적 위협을 가하게 된다. 결국 작가의 수상 거부로 종결되고 난 후 이 소설은 서구 세계에 사회주의 비판 서적으로 분류된다. 작품에 대한 논란, 시인이었던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는 특색 때문이라도 한번은 읽어야 할 것 같다.
보리스 파스테르냐크는 1890년 모스크바에서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과 시였다. 1914년 『먹구름 속의 쌍둥이』를 출간했다. 상징주의 시의 대가였던 알렌산드로 블로크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방책을 넘어서』, 『나의 누이의, 삶은』등의 작품이 나왔다. 시에서 산문으로 관심을 돌리고 난 후 10년 동안 써온 『닥터 지바고』는 그가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책은 지바고 부인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유리 지바고는 이른 부모의 죽음으로 농학자인 그로메코의 집에서 그의 딸인 안토니나(토냐)와 함께 자라게 된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시를 쓰는 일도 함께 하는 지바고는 라라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러시아는 1917년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난 후 긴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군의관으로 전쟁터에 나가게 된 지바고는 그곳에서 간호사의 자격으로 남편을 찾아 나선 라라와 재회하게 된다. 라라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하였고, 전쟁은 둘의 미래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모스코바로 돌아온 지바고는 굶주림과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장모의 고향인 우랄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은 라라가 파샤와 결혼하여 교사로 생활하던 곳이었다. 남편의 실종으로 유라틴으로 돌아오게된 라라와 유라틴에서 인접한 바르키이노에서 가족들과 거주하게된 유리는 재회하게 되고 둘의 사랑을 확인한다. 토냐와 라라 사이를 오가던 지바고는 산적들에게 잡혀 포로가 되면서 토냐를 비롯한 가족과 연락이 끊기게 되고 산적의 거주지에서 탈출하여 라라와 짧은 시간 재회하나 그녀와도 이별하게 된다. 변혁의 러시아 사회에서 유리, 토냐, 라라는 힘겹게 각자의 삶을 이어가고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유리 지바고는 전철 안에서 심장마비로 삶을 끝내게 된다.
모두를 사로잡은 기쁨 한가운데서 나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어디인지 통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는, 수수께끼처럼 우울한 당신의 시선을 만났소. 그것이 없어지도록, 당신의 얼굴에 당신이 운명에 만족하고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쓰이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뭐라도 내놓았을 거요.(270쪽)
이런 시적 고백이 있다니, 야전 병원에서 라라를 향하여 내뱉은 말이었다.
그보다 앞서 유리는 혁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라라에게 털어 놓는다.
혁명은 너무 오래 참아 왔던 한숨처럼 의지와 무관하게 터져 나왔어요. 각자 소생하고 부활하고 모두가 변화와 전환의 계기를 맞았죠. (~) 사회주의란 이 모든 개별적인 혁명들이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는 바다, 즉 삶의 바다이자 자족성의 바다요, 삶의 바다라고 했지만, 그건 천재가 된 삶, 창조적으로 풍요로워진 삶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말해요,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추상이 아니라 실제에서 체험하기로 작정한 거요.(270쪽)
혁명 마저도 시적으로 해석하려 한 지바고는 그런 자신의 성향 때문에 급격하게 변해가는 20세기초 러시아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저자는 그 시대 인텔리겐챠를 지바고를 통해 표현하고 했을 것이다. 결국 이 소설로 저자마저 씁쓸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도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인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헐리우드에서 만든 오마 샤리프 주연의 『닥터 지바고』를 보았던 사람들은 책도 읽기를 권한다. 책 속에는 사랑과 불륜만 들어 있는게 아니다. 가족을 돌보지 못한 무책임한 가장도 있고, 그런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고자 했던 감수성 짙은 의사가 있고, 거대한 사회의 변화 앞에서 무력하지만 삶을 충실히 살아갔던 개인들도 있다.
2024.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