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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끝
- 김성일
- 16,200원 (10%↓
900) - 2026-06-30
: 2,210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종말론이 미지의 미래가 아닌 세계, 종말이 말 그대로 살갗으로 느껴지는 세계에서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은, 정해진 파멸을 사람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과연 누가 무엇을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스승의 제자들은 말했다. 여시아문! 종말로 떠밀려가는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와 어중이와 떠중이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아, 아무것도!
읽는 동안,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내도록 반야심경 독송을 들었고, 잠시 생각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다. 새삼 우리 존재는 선형으로 지각되는 시간과 단일한 우주에 얼마나 단단히 붙들려 있는지 생각한다.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이곳과 저곳이 같은 동시에 같아질 수 없으며,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나 이것이 저것을 불러올 것이며…
p.8 "수영아, 세상이 너무 이상해졌어." (...) 정보의 보도 지침에서는 엄금하는 내용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끝나고 말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한다. 그 압박감 때문에 삶을 바꾸면 사교도, 무시하고 살던 대로 살아가면 보통 사람, 오직 그 차이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p.94 "누가 달을 파괴했는지 형사님은 아나?"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달은 파괴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제 맑은 날 밤하늘에, 달은 떨어뜨린 과자처럼 부스러져 떠 있다. 당장 오늘 밤에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수영은 달이 수억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온전하게 하늘에 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이것이고 저것이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너져 질서도 혼돈도 매끄러운 수식의 일부로 자리하는 완벽한 세계, 그러므로 끝없이 균열하고 붕괴되는 세계. 그 안의 작고 작은 존재들, 이해를 얻지 못한 미물들, 시간에 휩쓸려 미래도 과거도 끄집어내지 못하는 채로 그저 휘둘리기만 하는 초라한 순간적 존재들. 그리고, 그들과 다르다 자부하는 '힘'을 지닌 자들.
그 모두가 세계와 '법칙'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고, 더불어 누구도 그 의미를 진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한하고 광대한 매혹은 기실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허망한가.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이자 본령이라 할 그것은 진정 존재하는가? 거대한 시공의 차원 어딘가에 붙들려 주어진 배역에 충실히 놀아나고 있을 뿐이 아닌가?
p.134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뚫고 내려갈 수도 있다. 피바다가 되겠지. 하지만 그것은 통쾌한 피바다일 것이다. 제자들을 타이를 때 스스로 한 말을 떠올린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손을 더럽힐 수 없다는 말을. (...) 하지만 제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는 말종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나 하나쯤 죄를 뒤집어써도 괜찮지 않을까?
p.147 "시간이 두 개건 세 개건 백 개건, 태양이 지구를 돌건 지구가 태양을 돌건 둘이 엉켜서 탱고를 추건 간에, 우리는 사람이야. 거기에는 변함이 없어.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인 한 지켜야 할 게 있단 말이야." (...) "우주 그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기존의 미력하고 시시한 사람하고 같다고 할 수 있어요?"
혹자는 이 이야기에서 시작점과 끝점을, 희미한 마디마디, 불변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눈을 질끈 감고 안간힘을 쓰겠으나, 그저, 조금 울고 싶어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단단한 믿음과 매끄러운 환희 대신 설움과 공포, 절망과 혼돈 속에 주저앉기를 바란다. 아아, 초라하고도 미력하구나.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구나. 끝없이 다시, 또 다시를 꿈꾸는구나. 부질없이 버둥대는구나. 달은 산산조각 나고 시간은 끝날 것이므로. 동시에, 영원히 유예될 것이므로.
각자의 신을 찾아대기를, 소리 높여 부르짖기를 바란다. 꿈 속의 꿈, 영영 깨지 못한 채 중얼거리기를 바란다. 아, 드디어 끝인가봐. 와야만 할 끝. 모든 이야기가 소멸할 곳. 네가 태어나고 죽어 사라지고 세계가 부서지고 피어나는 그 곳으로 허덕이며 달려가기를. 도래할 종말을 있는 힘껏 붙든 채 길을 잃기를. 무너지는 세계에, 그렇게 홀로 남겨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영원히.
p.166 이 길을 걷기로 했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많은 것을 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옛집으로 가고 있다. '옛집'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하나니까. 그것을 아직도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나는 여기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p.353 나는 시간이 끝나면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나의 시공간에서 시간은 결코 앞으로 나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는다. 되돌아가고 끼어들고 겹친다. 스노글로브를 흔들 때마다 눈송이들의 궤적은 다르다. 하지만 홍콩에 눈이 내리다가 끝내 그친다는 사실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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