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여름은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부문을 수상한 미스터리 단편 모음집입니다.
일본엔 참 많은 미스터리 문학상이 있는데 저마다 추구하는 노선과 색깔이 다릅니다. 그중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은 기존의 수상작들로 미루어볼때 반전이나 잘 짜여진 추리 보다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물흘러가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중요시하는것 같고, 열여덟의 여름 또한 그 계보를 잇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 작품은 살인이나 그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일상미스터리로 생각될 만큼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미스터리를 즐겨 읽으면서도 소설에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그 순간 제가 속한 이 사회와 엄청난 이질감을 느낍니다. 경찰도 아니고, 어디 외딴 섬 등지에 갈 기회도 없고 한 저의 현실에서는 좀처럼 있을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표제작인 열여덟의 여름이나, 마지막작품인 이노센트 데이즈등을 읽다보면 살인 이라는 현실과 엄청나게 동떨어진 전개가 나오거나 그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일어나도 그게 마치 나의 일상인것 처럼 느껴졌더란 말입니다. 미스터리를 많이 읽다보면 가끔은 내가 직접 써보는 상상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것도 바로 저런 현실감이었는데 그게 이 소설에는 있습니다.
첫작품인 열여덟의 여름은 성장소설의 형식을 빌어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는 '살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임을 알고서 읽는데도, 반전이 나오기 전까진 흔한 연애놀음 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분위기를 만드는것도 한편으론 대단하다고 생각되네요.
그리고 그 살의의 발현이 나팔꽃인 것이 흥미롭습니다. 살의란, 꽃이 표현할수 있는 최고치가 아닐까요.. 소설속에서 이렇게도 쓰일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 하나로 인해 제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나팔꽃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한방에 확 바뀔줄은 몰랐어요. 바로 어제까지, 제게 있어 부지런함의 상징이었던 나팔꽃이 오늘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동안은 나팔꽃을 보면 오싹할거 같습니다.
두번째 작품인 자그마한 기적은 아무래도 미스터리를 쓰려다가 중간에 방향을 선회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이 작품도 미스터리 요소가 군데군데 있습니다. 반전도 있구요. 그런데 여 주인공 아스카에 대한 복선을 여기저기 깔아두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고 그냥 끝내버린 느낌이 들거든요. 물론 지금이대로도 드라마로는 꽤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읽기전에 금목서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으면 더 재밌게 읽을수 있을거 같습니다. 제가 반전이 나왓는데도 아! 그렇구나 할수 없었던 이유는 금목서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물론 인터넷지식말고 직접 꽃에게서 얻을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이 좋겠지요~
세번째 작품인 형의 순정은 재미있는 미스터리가 숨어 있을뿐 아니라 성장소설로도 훌륭합니다. 말의 사소한 차이에서 오는 오해로 빚어진 소동들이 재미있습니다, 그것을 헬리오트로프라는 꽃의 이름을 빌어 설명하는군요.
결말에선, 많은 고민끝에 결국 가고싶은 길을 걸어가는 두형제의 선택이 매우 부러웠답니다. 저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네번째 작품은 이노센트 데이즈 입니다. 이노센트.. 라는 말이 이렇게 가슴아플수도 있나요..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아이들의 이노센트 데이즈를 망치는 어른들 중에 혹시 내가 있진 않은지 생각하며 괴로웠습니다..
미스터리로서는 네 편의 작품중에 최고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좀더 살을 붙여 장편으로 냈어도 괜찮을거 같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매력적입니다. 다카시, 후미카, 그리고 역시 고스케..
시호가 말하죠.. "아까 후미카도 말했지만..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 여기서, 나도!! 라고 속으로 외치고 말았습니다..
후미카에게 어떤 나날들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고스케가 계속 그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상한 고스케라면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물론 그러겠지요..
여기에 등장하는 협죽도는 한마디로 무기입니다. 꽃이 그렇게 예쁜데 의외죠? 책을 읽고서 협죽도에 관해 찾아보던 중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협죽도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 있더군요, 괜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책을 읽고나면, 그걸로 좋은 작가가 있는 반면,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미쓰하라 유리가 그렇습니다. 플롯과 미스터리도 좋았지만, 그녀의 문장과 감정의 묘사는 마치 순문학의 그것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작품 또한 그렇지요.. 미스터리로 기대하고 읽어도, 에쿠니 가오리 풍의 간결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읽어도 모두 만족스러울거 같습니다.
제게 있어, 작품을 떠나 작가 그 자신이 이렇게 기대되는 것은 와카타케 나나미 이후로 두번째입니다. 미쓰하라 유리의 다음 행보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