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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cer400님의 서재
  • 내향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회 사용 설명서
  • 애덤 S. 맥휴
  • 17,100원 (10%950)
  • 2022-07-18
  • : 1,252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우울증과 부정맥과 항우울제 부작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잠 못 이루던 작년 여름의 어느 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내 목소리의 형태로 들려왔다.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해서 타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대형 교회에 나갔다. 열 살 때 앞집 목사님네 교회로 옮겼다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다시 예전에 다니던 대형 교회의 고등부로 옮겼다. 이름만 대면 대부분이 아는 교회고, 아이들이 많은 교회였다. 그렇다는 건, 어릴 때부터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계속 알고 지낸 아이들이 모여 있다는 얘기다. 처음 고등부에 간 날부터 그 보이지 않는 친목의 고리에 질려 버렸다.

두 달 정도 다니다가 결국 뛰쳐나와 엄마와 함께 성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6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11시에 들어오는 고등학생의 체력은 담임 목사님의 단조롭고 조용한 목소리를 버텨내지 못했다. 교회 광고와 예배를 드리는 내내 휘청거리면서 졸다가, 모든 순서가 끝나고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연주와 함께 모두가 일어나 마무리 찬양을 시작할 때에야 깼다. 찬양 팀은 손을 허공으로 쳐들고 몸을 떨며 울부짖었고, 엄마와 주변 성도들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부르짖었다. 순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신천지 광신도나 다름없다고 여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내가 이방인 같았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청년부로 옮겨 보기로 했다. 하지만 청년부의 친목은 고등부보다 더 심했다. 예배를 드리러 모인 건지 예배 끝나고 수다 떨고 밥 먹으러 모인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들어간 셀에는 청년부의 최고 인싸가 속해 있었다. 그는 처음 들어온 나를 웃겨 주기 위해 자꾸 농담을 했고 분위기를 주도하려 했다. 안 그래도 에너지의 총량이 높지 않고 잔잔한 나는 자꾸만 기가 빨렸다. 잠깐 혼자서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도 “야, 00이 혼자 있잖아. 누가 혼자 놔뒀어? 00아, 나랑 놀자.”며 말을 걸었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하는 큰 실수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 사람이 바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68쪽)” 내향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외향적인 사람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또 예배당에 들어갈 때마다 00 자매님 어서 오세요, 라며 자꾸 말을 거는 간사님들, 이것저것 캐물으려 하는 청년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예배가 시작하기도 전에 심적으로 완전히 소진됐다.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을 점점 늦추게 됐고, 그럴 때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다음엔 일찍 와서 대화도 하고 찬양도 해요” 하고 권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놀고 술 마시고 공부하고 돈 버느라 몸이 바빠지자,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는 날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7일 중에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게 교회 탓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교회에 가면 에너지가 바닥이 됐다. 결국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교회에 가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무신론자가 되었다거나, 하나님을 불신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하나님이 엄마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 2년 동안 지켜봤고, 대학에 온 이후 이상할 정도로 도전하는 과제마다 성공하는 것을 보며 나를 통해 하시고 싶으신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나님의 존재는 내게 의심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내 삶에 우선이 아닐 뿐이었다. 자꾸 알바를 하고 공부를 하며 나를 몰아붙이느라, 하나님이 내 삶에 끼어들 틈이 없게 만들었다. 바쁜 삶은 나를 내 안을 들여다 볼 여유로부터 유리시켰다. 부담스러운 감정으로부터는 멀어질 수 있었지만, 줄곧 피해 왔던 어둠이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덮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때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역사하시며 나를 사용하신다는 걸 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함께 소통하고 교류할 또래 그리스도인의 필요성을 느낀다. 신앙 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또래 친구들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지, 세상의 삶과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일치시키고 있으며 그 간극을 어떻게 마주하는지 궁금해졌다. 세상의 온갖 이해할 수 없고 불합리하고 화나는 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향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회 사용 설명서>를 읽게 되었다. 사람과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리고, 사람에게 세우는 장벽도 높은 나 같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고 싶었다.

이 책은 MBTI 유형을 기반으로 쓰인, 내향적 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한 책이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의 내향적 리더십에 관한 지침서다. 내향인 모두를 타깃팅하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되었는데, 리더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교회에 발이라도 들여놓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리더십에 관한 내용이 절반 이상이라 과한 느낌이 있긴 했다.

하지만 수확은 분명 컸다. 저자는 내향적인 사람이 어딘가 부족하거나 교회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향성을 더 바람직한 것으로 반기고 내향성을 개선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교회의 전반적인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의 절반 정도를 할애해 언급하는 ‘내향성’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이거 난데?’, ‘이거야말로 진짜 난데?’ 하고 공감이 된다.

그러면서도 내향성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외향성을 ‘배제해야’ 한다거나 하는 등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성격 유형을 맹신하는 목소리가 높긴 하지만, 나는 진짜로 영향력을 지니는 것은 개인에 대한 관심이라고 주장하고 싶다.(245쪽)” 저자는 MBTI의 네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내향성과 성격 유형을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과몰입’하지 않으며, 생리학과 뇌과학적 측면에서 내향성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봐 왔던 교회 지도자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과 달리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을 바탕으로 설득력을 확보한다.

특히 이 책이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부족함 없는 연역적 논리가 굳이 감성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마음을 울린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또는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기에 적절한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성격 유형에 따라 좌우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리더십의 은사를 내리기 전에 그가 외향적인지 확인하지 않으신다. 또한 실수로 은사를 내리지도 않으신다.(194쪽)” “나는 성격 유형이 아니라 부르심이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그 역할을 지속하는 데 결정적 요소라고 확신한다.(209쪽)”

앞서 나왔던 내향성과 성격 유형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신학적 설명을 끌어내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없고, 추상적인 믿음에 호소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게 안다는 것은 감정적인 일이 아니라 지성적인 일이다.(139쪽)” 나 역시 저자와 마찬가지로 ‘두뇌형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여러 설명을 종합해 보면 저자도 나와 같은 INTP가 분명해 보인다)

동시에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면죄부를 주지만도 않는다. “나는 우리 시대든 이전 시새든 교회의 역사에서 형제자매들을 정기적으로 만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하는 성숙한 신자를 만난 적이 없다.(139쪽)”, “하나님은 가장 내향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무관하게 살도록 하지 않으셨다.(215-216쪽)”,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복음 전도가 면제되지는 않는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복음 전도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는, 오늘날 대세를 이루는 복음 전도 방식들이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254쪽)”와 같이 내향적인 사람들이 교회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필요성과 정당성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외향성과 내향성의 균형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말마따나 외향성과 내향성은 서로의 대척점이 아니라, 연속적인 스펙트럼 선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교회가 내향적인 사람들을 오냐오냐 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예배를 외향적인 사람보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더 맞추어서는 안 된다. … 내향적인 사람이 예배에서 불편함을 느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가 늘 편안함만을 느낀다면 우리 신앙은 정체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외향적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예배 관행이 외향적인 사람들을 건전한 불편으로 이끈 적이 있는가?(283쪽)”

그렇다고 성격 유형에만 치우친 책도 아니다. “우리의 치유 처방전은 우리가 가진 내향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의 치유는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의 깊이를 살피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94쪽)”나, “우리의 개인주의 문화는 타인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자신을 규정해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도록 격려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의 정체성은 관계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명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그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관한 것이 된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없다.(95쪽)” 같은 대목은 세상 삶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메시지들은 독자를 담백하게 웃기는 유머와 함께 전달되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기도에 관해 책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복음 전도의 통로에서 시장을 장악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형적인 복음 전도에 관한 책들은 비행기 안을 가장 유리한 환경으로 설정한다. 1만 미터 고도에서는 복음 듣기를 싫어하는 불신자들이 달아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253쪽)”
“‘과도한 소통’에서 ‘과도한’이라는 말은 내향적인 사람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소통’만이 있을 뿐이다.(241쪽)”

저자 본인의 경험이나 다른 내향인들이 겪은 일에 대한 인용은 꼭 내 일처럼 느껴져서 더욱 몰입이 됐다.
“어떤 내향적인 사람들은 감정을 조종한다고까지 느껴지는 최근의 예배 찬양과 그 반복되는 후렴구의 깊이 없음을 비판한다.(281쪽)” 내가 그 대형 교회의 성인 예배에서 느꼈던 것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번은 찬양 팀 인도자가 한 찬양의 후렴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세 봤는데, 최대가 일곱 번이었다. 그는 울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했는데, 물론 예배 후의 감동 때문이었겠지만 내겐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성숙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복음주의 전통에 속한 교회들 중 일부가 보여 주는 격의 없는 모습은 헌신과 환대에 대한 최선의 의도를 품은 채 내향적인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다. … 실제로 내가 인터뷰한 내향적인 사람들은 대개 예배 전의 어색한 교제 시간을 피하려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늦게 나온다고 인정했다.(278쪽)”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분명 그 교회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나처럼 몇 주 나가다가 결국 이해 받기를 포기하고 더 이상 발걸음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코 고립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꾸준히 환기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하기에, 우리는 교회에서 인사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284쪽)”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너를 함께한다, 너를 사랑한다’라는 생생한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으로 내 믿음이 갑자기 욥만큼 성장했다든지 내가 엄청난 성인이 됐다든지 하지는 않았다. 믿음은 교제와 소통과 상호작용과 예배 속에서 자라난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하나님은 각자의 독특한 성격 가운데서 일하시고, 그들의 개별적 은사를 그들에게 복 주시고 다른 이들에게 복 주시는 데 사용하신다.(81쪽)” 내가 나의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복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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