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를 보는 식물학자 리뷰
노루 2021/10/3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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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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츌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는 법의식물학자의 에세이와 식물과학서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책이다. 영국 큐왕립식물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10년 넘게 식물 표본실 큐레이터로 일한 저자가,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법의식물학자가 되어 범죄과학의 자문위원으로 일하게 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마 ‘법의식물학’이라는 분야가 국내에 소개되기로는 이 책이 첫째일 듯하다. 법의학 자체도 드라마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생소한 분야인데, 법의식물학이라고 하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범죄 수사에 식물학을 활용하다니. 하지만 정말이지 ‘그럴 듯’할 뿐만 아니라 무척 과학적인 방식이라, 이제까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주제라는 게 이상할 정도다.
“법의식물학은 법의환경학이라는 폭넓은 범죄과학 분야의 일부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범죄수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연계의 물질을 모두 일컫는 포괄적 명칭이다. 토양, 곤충, 동물, 식물, 균류에서 나오는 데이터 모두 이런 환경에 해당한다.” 31p
저자는 법의식물학자로서 살인 같은 심각한 범죄가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밝히는 것을 돕고, 실종자나 살인사건 피해자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일조하기도 하고, 환경에서 나온 증거를 활용해 용의자와 범죄 현장 및 희생자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 책에는 법의식물학자는 어떤 일을 하는지는 물론이고 저자가 참여했던 범죄 수사와 해당 사건 현장에서 관찰한 식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들이 수사에 미친 영향 같은 이야기들도 실려있다. (30~31p)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몇 군데만 옮겨보면 이렇다.
“전체적으로 식물을 살펴보면 이 남자는 그냥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누워 죽은 것으로 보였다. 평화로워 보일 정도였다. … 식물의 줄기와 가지가 입은 손상이 불규칙하고, 대부분은 호장근이었다. 이 남자는 약 30미터 정도 철도 제방을 위아래로 방향을 바꾸며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덤불 아래서 혼자 휘청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 개개의 호장근 줄기는 아주 쉽게 손상을 입어서 몇 달이 지난 후에도 그 영향을 관찰할 수 있다. 현장에서 만난 호장근의 경우 솜털 같은 하얀색 꽃을 지지해주는 작은 곁가지도 손상되어 있었다. 이 꽃은 늦여름에 개화한다. 그런데 줄기가 꽃이 피는 계절에 손상을 입은 것을 보면 시신이 그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대략 추정이 가능하다. 몇 달쯤 된 것이다.” 101~103p
”연기 이야기가 중요한 정보로 여겨졌기 때문에, 경찰은 연기가 피어오른 날짜를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나는 불이 난 자리 주변과 그 위로 드리운 블랙베리덤불 줄기가 불에 탄 패턴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 이 줄기를 태운 불은 최근의 것이 아니었다. 큰 줄기를 따라 그을린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 옆에서 돋아나온 곁가지는 손상을 입은 흔적이 없었다. 이 줄기는 불에 탄 후에도 몇 주에 걸쳐 다시 자란 것이 분명했다. … 이전 성장기, 그러니까 작년 여름과 초가을 동안에 자란 것이 분명했다. 그럼 큰 불은 적어도 여섯 달 전에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래도 경찰은 정보 수집 전략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111~112p
이 짧은 부분만 보더라도 법의식물학이 무척 흥미로운 분야라는 게 느껴질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시체나 범죄 사건보다는 식물 이야기의 비중이 비교적 꽤 높은 편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일반인이 느끼기에 약간 과한 무게의) 식물 덕후력을 여기저기서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랄까? 아무래도 표지의 엄숙하고 섬뜩한 분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스펙터클한 범죄 이야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한 글인 만큼 식물들에 관한 지나치게 상세한 이야기를 조금 줄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번역서이니 길벗출판사 편집자 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식물학을 잘 아나보지…?)
몇 달 전 메리 로치의 <인체재활용>이라는 현재는 절판된 책을 읽었다. (아직 빌 브라이슨의 저서를 읽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메리 로치는 세상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무척 다양한 분야에 깊게 파고들며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인체재활용>은 그중에서도 시체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는 어떤 부패 과정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시체가 의학이나 과학 등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죽음 이후 시체의 보존 혹은 장례 방식은 어떻게 다양한지 등을 다룬다. 전혀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뻔했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무척 컸다.
하지만 <인체재활용>은 시체와 식물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반면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는 '시체'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리 로치가 이 책을 봤다면 분명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면 더욱 풍부하고 재미 있는 독서 경험이 됐을 텐데… 아무래도 영국에서 출판된 책이라 그런지 미국 작가에게 추천사 써 달라고 할 생각을 못한 걸까?
나는 메리 로치가 이 책에 환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체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메리 로치만큼이나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글쓰기 능력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부분들:
“어느 해에 학교에서 지리학 현장학습을 갔다. 하늘을 떠다니는 듯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리학 선생에게 완전히 반했기 때문이다. … 고지대를 걸었는데 내가 쌍잎난초를 찾아냈다. 초록색 외계인을 닮은 작은 초록색 꽃이 피며 사랑스럽고 얌전해 보이는 난초다. 지리학 선생이 뭘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멋지고 사랑스러운 난초라고 설명했고, 선생은 성심성의껏 반응하며 언제 꽃을 피우는지 물어봤다. 나는 이미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선생은 놀란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다가 꽃이 참 딱하게 생겼다고 말하고는 일어나서 걸어갔다. 그렇게 선생과 친해질 기회를 날렸다!” 78~79p
“10대 시절에 나는 독성 식물들을 키우는 꽃밭을 갖고 있었다. 투구꽃, 독미나리, 협죽도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당시 가족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인 아버지를 해치우는 데 필요한 치사량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257p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인상적인 부분을 꼽자면, 책날개의 저자 소개란에 저자가 동성애자라는 정보를 싣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게 당연한 일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동성애자는 소수자일 뿐 틀리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며, 이 책에선 저자의 식물학자로서의 정체성 외에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진보적 의식이 느껴져서 무척 평온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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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독자: 메리 로치의 <인체재활용>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식물학이나 법의학, 프로파일링에 관심이 있는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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