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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driver님의 서재

얼마전 핸드폰이 포맷되었다. 송두리채. 조카가 갖고 논다고 만지작 거릴때 내버려둔게 아마 일을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터치가 먹질 않아, 전원키를 눌렀더니 그마저도 말을 듣질 않았다. 배터리를 뺏다가 끼웠더니, 아무런 반응없는 익숙하고도 낯선 플라스틱 덩어리가 내 앞에 놓여있었다. 하긴 누가 굳이 만지지 않아도 언제 고장나도 이상할게 없는 고물이긴 하지만. 신경안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반응이 없으니 아이 잃은 엄마의 애타는 심정이 되어 급하게 AS기사를 찾은 결과 돌아온 답변. 기억을 잃어 버린거 같습니다. 그렇게 초기화된 내 휴대폰은 새로운 자아를 찾고 이내 순수해졌다. 혹여나 잃어버린 기억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 있으면 어떡하나, 애써 메모한 생각들이나,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되지는 않을까 싶은 조바심이 찾아왔다. 하지만 손톱을 깨물 순간도 없이 커다란 해방감이 몰려왔다. 기뻤다. 보험외판원은 못되는 운명인가보다.
얼마전에는 친구에게서 날아든 문자메시지를 클릭했더니 푸른피부의 얼굴책이 화면 가득 들이밀고 나왔다. 몇가지 내용들을 기록하니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들이 길고긴 미끄럼틀처럼 끊임없이 펼쳐졌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마저 나의 친구 후보군으로 등록되어 있는 걸 보며 두려움이 찾아왔고. 본능적으로 갈고리 모양의 버튼을 눌러댔다. 무심고 열어졌힌 방에 뱀 한마리 발견한 듯. 무서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과거에 존재해던 사람들은 과거 속에 두고 싶다. 언뜻, 혹은 종종 그리워하고 싶다. 이미 지나버린 관계에 공연히 몇개의 소수점을 흘리고 싶지않다. 좋은 기억만 정리해 말끔한 정수로 기억하고싶다. 기어코 닫혀버린 그 방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보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지워진 휴대폰을 보면서 홀가분해 하나보다. 부유하기보다 침잠하며, 발산하기보다 수렴하며, 원심력보다 구심력이 작용해 그나마있던 넓이의 원마저 점으로 만드는 그런 지독한 인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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