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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의 서재
  • 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 12,600원 (10%700)
  • 2026-06-12
  • : 31,530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문장은 현상을 설명하며, 많이 정제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해설처럼, ‘담담하며 고요한 절제의 미학(p.237)'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경계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봤기에 절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은 독일에 있지만 영혼을 고국에만 두었다면 이미륵의 문장은 격한 울음이었을 것이다.

 

감정이 절제된 채, 묵묵히 진행되는 이미륵의 글은 비슷한 시대를 자전적 내용으로 쓴 박완서의 문장과 대조적이다. 집요하고도 선득한 느낌마저 드는 박완서의 문장에 비해 그의 글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글을 읽을 대상이 그 당시 한국을 거의 모르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인이 아닌 나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시선으로 읽혔다. 여기에 실제 이미륵이란 사람을 넣어 읽는 것과 그를 떠나 단지 이 책을 소설로만 읽는 경우다.

 

이 소설에는 구시대에 태어나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혼란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독일로 망명길에 올라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한 젊은이의 애환도 있다. 말도 생활환경도 다른 그 먼 곳에서 겪었을 서러움과 인종차별, 고향에 대한 향수는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전하다고 여기고 간 그곳이 나치의 소굴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의 현장이 되었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이미륵의 고단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언제 들어도 디아스포라의 사연은 슬프고 먹먹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서술된 여기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지만, 고향, 가족, 지나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소설의 모든 곳에 따뜻함이 있다. 사람들의 순수와 사심 없는 태도에 감탄할 정도다. 다만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한 두루뭉술함과 중화사상에 젖은 그 당시 지식인의 태도가 아쉬웠다. 먼 훗날 그 시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답답함이 느껴졌다.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기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대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여인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난 ‘나’는 미륵(彌勒)이란 아호로 불리게 된다. 5세의 미륵은 사촌 형 수암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버지가 작고한 동생의 식솔을 거둔 것이다. 남편이 죽은 고모와 그의 아들 칠성과도 잠깐 동안 함께 지낸다.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친척들도 챙겨야 했던 아버지의 고단함이 보였지만 천석꾼 집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미륵, 수암, 칠성은 아버지가 집에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난치며 싸우고 벌을 받으며 개구 진 어린 시절을 보낸다.

 

퉁풍으로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자, 아버지는 서당을 없애고 수암 가족과 칠성 가족도 분가한다. 북적댔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미륵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미륵은 계속 한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이미 신식학교가 들어와 서양 또는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미륵도 학교에 입학하고, 힘들어하며 과학과 수학을 배운다. 특히 영어는 미륵에게 너무 어려운 공부였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미륵의 공부를 도와준다. 미륵의 집안은 세계정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미 미륵의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고 공부에 대한 진도도 많이 나간 상태였다. 미륵도 운명처럼 유럽을 생각하며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일찍 한국에 들어 온 일본인은 거의 장사를 했고 사람들은 ‘왜놈들’이라 지칭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고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한다. 어느 여름 날 미륵은 아버지와 옥계천변으로 물놀이를 나가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날 저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미륵은 송림으로 가서 잠시 칩거하지만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으로 진학하기 위해 해주에서 서울로 간다. 의학을 배우고 서울 생활을 하며 미륵은 새 시대에 눈을 뜬다. 여지껏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것들이 서양의 학문에 비해 턱없이 비효율적인 것이 많았던 것을 공부를 통해 알게 된다.

 

경성의전에서의 여섯째 학기 중에 3.1 운동이 일어났고 미륵은 참가해 수배자가 된다. 미륵은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의 수도 묵덴, 천진을 거쳐 남경, 양자강을 지나 상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몇 달 기다리다 여권이 나오자 프랑스의 거대한 여객선인 ‘폴 르카’호에 탑승한다. 사이공, 실론 섬, 싱가포르, 인도양, 지부티, 홍해, 시나이 산, 수에즈 운하, 지중해, 그리스, 이탈리아, 메시나 해변을 지나 마르세유 항에 입항한다.

 

미륵은 그곳에서 독일로 가 어려운 언어를 공부하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회상한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매일 답장이 왔는지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어느 낯선 집 마당에 피어있는 꼬리 관목에 눈이 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기도 한다. 해주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본 꽃이었기 때문에 반가워서다. 여러 계절이 지나 드디어 도착한 누나의 답장에는 어머니가 며칠의 신고(辛苦)하신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 있다.

 

 

나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조부모와 부모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 존중을 받으셨고 한복을 입고 생활하였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9일상을 했었고 시골집 마당에 차양을 치고 조문객을 받았었다. 대를 이어 종손이 된 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와 공부를 해 은행원이 되었다.

 

한 반에 60명이 넘고 강압적이며 일률적인 교육을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받았고, 그때는 철저히 아날로그의 생활을 했다. 친지와 친구의 전화번호를 수십 개 외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각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우리 친구들은 편지를 열심히 주고받기도 했다. 빠르게 컴퓨터가 세상을 점령했고 우리는 또 디지털의 세계에 입문해야 했다. 지금은 곧 대세가 될 인공지능이 고개를 내민다. 아니 달려오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난 거기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언제나 새 시대는 물밀듯이 밀려오고 나와 같이 미륵도 구시대와 새 시대의 경계, 타국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아픈 역사의 반복만은 없길 바란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며 독일에서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담은 글이다. 어떤 배경이든 노스탤지어와 디아스포라가 있다면 누구나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런 내용으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서술된 이국의 서사가 전후 독일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끝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륵은 억울하고도 착잡한 심정이었겠지만, 인간 삶의 허무와 불가해함을 이해했기에 이렇게 정제된 글로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동과 비판의 양가감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미륵의 고뇌, 여정, 그의 부모님의 죽음은 애틋했다. 작가 연보에 의하면 미륵은 조혼을 해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마 그들은 독일로 가지 못한 듯하다. 두 아들은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읽는다는 것에 기분이 약간 묘했다. 오래 전 전혜린의 번역으로 읽었을 이 소설은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제목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기대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으로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재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이렇게 우연으로 다가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 같다.

 

[사라져가는 조선의 풍경과 기억을 보존하는 기록인 동시에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는 증언으로서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왜 자신의 언어와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변호한다. 조국을 떠난 뒤에야 가능해진 회고이자 타국의 언어를 선택한 뒤에야 구성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품이 독일어로 쓰인 것은 선택의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p.240~241,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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