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내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두 개의 독서 동아리는 보통 연말에 내년에 읽을 책을 투표로 결정하는데 이번에 러시아 소설이 거의 선택되었다. 도서관의 ‘클래식’ 독서 동아리는 주로 고전을 읽기에 당연하지만, 동네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서도 나중에 남는 건 고전이라며 결국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상반기에 읽기로 했다. 선정된 책 모두가 3권과 4권짜리여서 한 달에 한 권씩 읽다보니 어쩌다 매달 러시아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다.
나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나의 최애 작가 중 한 사람도 도스토옙스키였다. 하지만 이번에 ‘악령’과 ‘안나 카레니나(재독)’를 동시에 읽다보니 살짝 시계추가 도스토옙스키에서 톨스토이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악령’에서 도작가에게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전개가 너무 지루했고,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도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 요소가 있어 식상했다. 작정하고 쓴 정치 소설이라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에 비해 ‘안나 카레니나’는 너무 훌륭했다.
평론가 신형철은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신형철, 마음산책, 2014)‘고 썼다.
신형철의 글처럼 톨스토이는 기승전결의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안나‘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문학의 역할에 잘 맞았다. 요즘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도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진가는 발휘된다. 막힘없이 잘 읽히면서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과 전쟁의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 있는지 매번 감탄한다. 그렇지만 너무 세련되고 매끈한 톨스토이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감상적이지만 절절한 그의 문장이 그립다. 길을 가다 계속 자동차 방지 턱에 걸려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뒤로 갔다하는, 그런 불편함이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에는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발전이 느렸다. 1812년 조국전쟁에서 패주하는 나폴레옹을 쫓아간 귀족 군인들이 유럽의 발전된 모습에 너무 놀라 개혁을 요구한 혁명이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이었다. 마침 그 봉기는 니콜라이 1세 황제 취임식에서 일어났고 그 사건으로 겁먹은 황제는 집권 내내 철권정치를 시행한다. 푸쉬킨과 도스토옙스키(페트라솁스키 사건)는 강력한 니콜라이 1세 압제의 희생양이었다. 러시아에서의 개혁은 1860년대 이후 알렉산드르 2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영향으로 러시아 문학은 영미나 프랑스 문학이 가는 길을 순서대로 따라가지 않아 독특한 개성이 있고, 그것이 또한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러시아의 메레쥐콥스키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에게는 낮은 점수를 준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의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나보코프는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투르게네프 순으로 순위를 매겼고 도스토옙스키에게는 혐오에 가까운 혹평을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감상적 글쓰기를 비판했는데, 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 고통의 숭고함에 대한 시각을 너무 간과한 것 같다.
윤새라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는 두 사람의 생애에서 시작해, 6편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하며 두 작가를 비교 분석한다. 두 작가는 같은 나라,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작품 역시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월등히 많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는 ‘육체의 비밀을 보는 자’고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의 비밀을 보는 자(p.16)‘로 표현했다. 톨스토이는 몸의 작은 디테일을 자세히 서술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외모묘사를 최소화하고 나머지는 주로 대화를 통해 나타낸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각 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를 굉장히 자세히 서술한다. 환경에 따른 외모 변화에도 각별히 신경 써 표현한다. 심지어 보리스 드루베츠코이의 엄마인 안나 미하일로브나 드루베츠카야가 등장할 때마다 ‘울어서 부은 듯한 얼굴‘이란 표현을 반복해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대화체 문장이 많아 그것을 읽어 내기가 피곤할 때도 있다.
조지 스타이너는 두 작가의 대립 구도를 톨스토이는 서사시의 시인이며 이교도인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극작가이고 기독교신자로 놓고 비교한다. 톨스토이는 호메로스에 가깝고,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연극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을 펼치고, 창작의 뿌리에 살인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있다고 짚어낸다(p.23). 하지만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대화는 연극에서의 대화의 역할(극적인 대화)과는 다르게 ’대화적 말‘이라고 하며 ’말‘은 연극적 요소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 인물의 말 속에 여러 사람의 말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이 작가로부터 독립된 반면 톨스토이 소설은 작가의 말이 인물에 투영되어 있다고 했다.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라는 그리스 단어 둘은 한 단어로 결합한 것으로, 그 자체로 시공간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p.26). 바흐친은 이 단어를 문학에 접목시켜 연구했다. 한 작품 안에 여러 크로노토프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서로 섞이면서 충돌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메레쥐콥스키와 스타이너의 비교 연구를 이어가며 발전시킨 두 작가에 대한 비평이다.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발표순서에 따라 두 개씩 묶어(전쟁과 평화/죄와 벌, 백치/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 형제들/부활) 시공간과 공통되는 주제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두 작가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두 작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그들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귀족 출신이자 부자인 톨스토이는 여유 있게 글을 쓰면 되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벌기위해 전투적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을 이어갔다. 원고료도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가 훨씬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빚쟁이를 피해 유럽으로 가서 글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궁해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린 적도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보다 훨씬 더 많은 농노가 있는 영지를 가질 정도로 돈이 많은 작가였다.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는 나중에 극우주의자이면서 러시아정교의 신봉자가 되고,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진보적 개혁가가 된다.
‘전쟁과 평화’는 1865년부터 ‘러시아 통보’에 연재되고 ‘죄와 벌’은 그 다음해인 1866년에 같은 문예지에 연재된다. 이 시기는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때였고,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1864년 아내와 형을 동시에 잃고 난 후였다. 톨스토이는 행복의 정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경제난에 시달리며 각 첫 대작을 쓴다. 윤새라는 이 두 소설을 조지 스타이너의 서사시와 비극에 기반해서 비교하며 분석한다. 이 두 소설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에 대한 서술도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백치’와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그 시대의 여성 문제, 아름다움과 선에 대한 의미에 대해 서술한다. 시공간의 변화도 비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는 ‘죄와 벌’에 비해 넓어지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에 비해 좁아진다. ‘죄와 벌’과 ‘백치’는 똑같이 단독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미시킨을 내세우지만 ‘백치’는 여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도 부각시킨다. 두 작가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카라마조프 형제들’과 ‘부활’에서는 주로 법과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두 소설 다 법정장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부활’은 끝에서 시베리아라는 공간에서 만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에서 출발하여 여러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작가 개인과 소설적 배경이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특히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 분석해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해주어 훨씬 더 이해하기 좋았다. 책 전체의 문장이 딱딱하지 않고 읽기 쉬운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여기에 소개된 6개의 장편소설 중 4편을 읽었고, ‘전쟁과 평화’는 읽는 중이고 ‘백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의 소설에 대한 해석에 대다수 공감했다. 다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석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안나의 자살을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로 본다. 레빈과 안나를 비교하며 그 둘의 차이점을 ‘삶에 대한 기본 태도’로 본다. 여러 단점과 실패에도 레빈은 노력하고 소통하지만, 안나는 질투의 화신으로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레빈의 견실한 결혼생활을 칭찬하며 안나는 근본적인 삶의 양식을 버리고 레빈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한다. 물론 저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빈과 안나의 비교는 19세기 러시아가 남자와 여자에게 가하는 차별이 없어야만 정당할 것이다. 똑같이 불륜을 저지르는 브론스키는 안나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대하는 사교계의 시선도 다르다. 그 시대 여성이 갈 수 있었던 영역은 사교계 아니면 연회뿐이다. ‘전쟁과 평화’의 나탸샤도 파티에 춤을 추러 가거나 집으로 초대된 손님들과 교류하는 것으로만 사회생활을 한다. 마리야 볼콘스카야는 아예 아버지가 짜놓은 시간표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안 그래도 좁은 여성의 영역에서 그마저도 거부당하고 집에 칩거해야할 안나에게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과 심리적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이혼을 해주지도 않고 안나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제약이 너무 많은 안나에게 과연 레빈처럼 건실한 삶에 대한 기본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에 비해 안나에 대한 비난과 타락에 대한 프레임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테마로 볼 때 두 대가는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장편소설별로 같은 관심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두 문호가 소설을 통해 만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같은 테마를 다루는 다른 시각, 다른 가치관, 다른 방식이다.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영웅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법 개혁으로 달라진 재판의 맹점을 드러내면서도 서술 기법이나 해결책이 다른 식이다. 그렇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만나고 엇갈린다. 더 나아가 시공간 매트릭스를 매개로 살펴본 장편소설의 진화 과정은 두 작가의 만남과 엇갈림을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넓게 시작해 좁아져 가고, 도스토옙스키는 반대로 좁게 시작해 점차 넓어져 간다.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