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액스(AX)』를 원작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었다. 박찬욱 감독이 왜 이 소설의 영화화를 ‘필생의 프로젝트’로 열망했고 17년 만에 기어코 스크린에 올려야만 했는지 궁금했다.
1997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소재와 내용의 전개가 굉장히 특이하면서 쇼킹한 면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주인공 ‘버크 데보레’는 치밀하게 설계해,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사회적 현상과 구조적 모순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가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책에 여러 번 나오는 문장이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 상관없이 일단 그 자체로 봐야한다. 이 책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면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이것들을 과감히 배제한 채, 오직 한가지만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전 세계를 움직이는 조직적이고 악랄한 경제적 흐름에 한 순간 희생되는 개인과 그 가족들 각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저 작가가 의도한 것만을 볼 필요가 있다.
23년간 중간관리자로 한 제지회사에서 계속 근무해온 ‘버크 데보레’는 정리해고를 당한다.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2년 동안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재취업을 못하고 있다. 한창 아이들에게 들어갈 돈이 필요하고 집 대출금도 남아있는 상태다. 아내는 두 군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최대한 긴축재정을 했지만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 ‘돈이 바닥났다.(p.33)’ 그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다시 직장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구직자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버크 데보레는 우체국 사서함의 주소를 빌려 주로 제지업을 다루는 잡지에 구인 광고를 낸다. 전해 축전지 제지 기계로 가동되는 가상의 제지공장의 새 생산 라인을 맡아 관리해줄 특수 용지 전문가를 찾는다는, 한마디로 가짜 내용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그 주소로 200명이 넘는 사람이 이력서를 보내왔고, 그는 자신과 비슷한 경력의 경쟁자를 추려 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거침없이 실행한다. 그들과 자신이 원하는 삶은 비슷했고, 냉혹한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필요할 것을 다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포기하거나 아님 둘 다 싸워 끝장을 봐야만 한다.
그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독일군에게 빼앗아 온, 50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총 ‘루거’가 있었다. 버크는 자신이 지원할 직종에 취업할 가능성이 있는 경쟁자를 찾아가 루거를 쏴 죽여 버린다. 그는 이력서를 제출한 경쟁자 4명을 죽인다. 일이 꼬여 릭스를 죽일 때 그의 아내도 죽인다. 마지막으로 버크가 취업을 원하는 회사의, 그 직책에 딱 버티고 있는 장애물인 ‘업튼 팰런’을 죽이고 그는 그 자리에 재취업하는데 성공한다. 6명을 죽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다.
운 좋게 버크 데보레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이 계획한 일을 착착 진행해 성공한다. 그 사이 아내의 외도도 정리되고, 상담을 통해 아내와의 관계도 개선된다. 말썽피웠던 사춘기 아들의 사고도 말끔하게 해결해줬다. 돈이 만사형통이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실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야기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실직당한 이유가 자본주의 원리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자신과 그의 가족이 중산층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버크의 회사는 적자가 아닌 상당히 좋은 영업실적을 올리고 있었음에도 직원의 4분의 1을 한꺼번에 해고시켰다. 해고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일률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언제나 실직자가 구직자보다 많은 것이 문제다. 사람을 기계로 대처하고 필요 없어진 그 제품 라인을 다른 회사에 매각해 막대한 수익을 남긴다. 끊임없이 개발되는 신기술은 새로운 인력을 필요로 하고 쓸모없어진 직원은 해고당한다. ‘변화에 뒤처지면 끝장이지만(P.26)’ 그것을 좇아가기는 쉽지 않다. 버크는 ‘종이’라는 복잡한 주제의 전문가였지만, ‘종이’라는 더 복잡한 주제가 난데없이 들어오며 수 십 년간 일해 온 회사에서 순식간에 도끼질당해야 했다. 투자 수익에만 관심이 있는 주주와 회사의 흑자를 위해 임원들은 수천 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는다. 해고자 개인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
오래 전 TV에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독일의 한 가공육 공장을 취재한 것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모든 생산라인 중 각 한 곳에만 배치된다. 먼저 소가 줄지어 들어오면 한 노동자는 소의 머리에 전기 충격기를 들이댄다. 기절한 소는 거꾸로 매달려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어떤 노동자는 소의 배를 가른다. 내장을 쏟아낸 소는 또 움직여 가죽이 벗겨진다. 다른 노동자가 작두를 쥐고 소의 앞발을 자른다.....이렇게 노동자는 생산 라인의 한 곳에서 하루 종일 한 가지 일만 반복적으로 한다. 점심시간에는 자신이 살생한 그곳에서 도시락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먹는다. 아마 지금은 그마저도 거의 대부분 기계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일만을 반복적으로 한 노동자가 해고되었을 때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작가 웨스트레이크는 이 책에서 거대하게 조직된 자본주의의 논리와 그에 따른 냉혹한 현실을 고발한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이 다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잔혹한 사회가 한 사람을 총으로 무장시킨 채 밖으로 내몰고 있으며, 그는 총질을 하면 할수록 더 편하게 잘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렇게 변한다.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p.162]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의 영화답게 미장센과 대사 특유의 유머와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났다. 소설의 진지한 블랙코미디를 가볍게 비틀었지만 거기에 소설보다 더 끔찍한 비극이 들어있어 좋았다. 다만 사회적이고 거시적인 것을 배제한 채 영화를 가족 판타지로 축소시킨 것이 아쉬웠다.
실업자가 되면 본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힘들다. 똑같은 처지지만 만수(이병헌)와 범모(이성민)의 대처는 다르다. 만수는 총을 쏴서라도 가족을 지키려 하지만 범모는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누가 더 맞다, 누가 더 잘한다는 있을 수 없다. 만수의 행동이 그 어떤 이유라도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의 차이나는 행동으로 만수의 아내인 미리(손예진)는 그의 동조자가 되고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는 적이 된다. 아라는 범모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에게 “실직당한게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문제야”라고 말한다.
어느 누가 실직에 대처하지 않겠는가? 대처해도 잘 안 되니 문제가 된다. 실망하고, 자포자기하고.… 끝내는 ‘어쩔수가없이’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 버크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벌인 짓들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자살을 하지 못한다.(p.114)’고 했다. 만수와 소설과 다르게 그의 살인을 알게 된 미리역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불안과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느낀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재취업한 만수는 거대한 기계실의 관리를 맡고 있다. 그는 그저 그 기계들이 잘 돌아가는지 체크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기계가 다 알아서 종이를 생산해준다. 만수는 귀에 귀마개(기계가 돌아가며 내는 소리가 엄청나다)를 하고 손에 패드를 들고 기계 사이를 걷는다. 그의 얼굴엔 안도의 미소가 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암시한다. 총질로 가까스로 거기에 갔지만, 멀지 않아 그의 길은 또다시 험난해질 것 같다. 지독한 박찬욱 표 블랙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