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역사 안에서 한 인간의 삶과 정체성이 온전히, 자의적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각자 앞에는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놓여있는 경우가 많고 그것에 의해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무조건 살아남고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서 ‘나’란 존재는 없어진다. 종교, 관습, 조국은 한 개인을 죽이기도, 배반하게도 만든다. 사랑과 연민은 욕망과 권력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이 알하산 이븐 무함마드 알와잔 알파시 알자야티에서 조반니 레오 데 메디치로 바뀐, ‘레오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인 레오)’로 불리는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이 남자가 부딪혀야할 변화무쌍한 역사는 곧바로 그의 것이 되어버린다. 온 몸으로 역사가 원하는 대로 삶을 바꿔야만 살 수 있다. 그에게는 어느 것 하나 비껴가는 일이 없고, 요행과 불운, 행운이 따른다. 그리고 용케 끝까지 존재한다.
8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다. 1469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의 결혼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 있는 모든 가톨릭 왕국을 통합하는 계기가 된다.(p.32)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1480년부터 연합하여 그라나다를 공격했고, 1492년 마지막으로 그라나다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했다. 이 책에는 크리스토발 콜론(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 등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사벨 여왕과 만나기를 원했고 여왕의 구미가 당기게 할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1492년도가 흥미롭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에 그라나다의 이슬람세력은 가톨릭 세력에 의해 영원히 추방된다.
이 책은 1488년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라마단 시기에 무함마드의 아들 하산이 할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산이 태어난 때, 이미 그라나다는 흔들리고 있었다. 가톨릭 국가의 침입과 동시에 이슬람 세력 내에서도 7년째 내전을 이어오고 있었다. 어느 세계든 망하기 직전에는 상황이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정말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사기열전의 내용을 거의 답습한다.
술탄은 후궁, 그것도 기독교도 귀족 가문 출신의 노예에게 반하여 조강지처인 왕비와 아들들을 감금한다. 왕비는 아들을 탈출시켜 아버지 왕을 죽이게 만든다. 술탄이 된 왕자는 향락과 쾌락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고 측근들은 수탈로 재산을 축적한다. 군인들은 봉급을 받지 못한다. ‘평화를 원하는 파’와 ‘전쟁을 원하는 파’로 나라는 분열된다. 왕위 문제로 세 번이나 내전을 벌여 자멸한다. 가톨릭 연합군에 의해 그라나다는 고립되어 기근과 불안에 휩싸인다.
1492년 술탄 보아브딜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에 항복한다는 그라나다 조약에 서명한다. 그라나다의 몰락으로 알람브라 궁전을 ‘가톨릭의 왕들‘에게 내주고 수많은 궤와 천으로 싼 물건들을 실은 말과 노새와 함께 술탄 보아브딜은 떠난다. 비참한 신세로 떠나는 보아브딜이 그라나다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에 거기서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을 망연히 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스티야 사람들은 실각한 술탄이 거기서 치욕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언덕배기를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이라고 불렀다.(p89)
몇 년 후, 하산 가족은 알메리아 항구에서 북아프리카의 페스로 몰락한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그 뒤 하산은 페스에서 카이로로, 다시 로마로 여정을 떠나야 했으며 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외교관인 외삼촌을 따라 사하라 사막을 횡단했으며, 외교관, 사업가, 여행가로 활동했지만, 메카에서 튀니지로 돌아가던 중에 해적에게 납치되어 로마로 보내진다. 로마에서 교황 레오 10세의 눈에 들어 가톨릭으로 개종해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하산은 그 긴 여정을 기록한 《아프리카 지리지》라는 연대기를 쓴다.
레바논 사람인 작가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 내전으로 인해 1976년 프랑스로 귀화했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집필한다.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저자의 첫 작품이다. 이 책에는 1488년부터 1527년까지의 하산이 지나온 곳의 역사가 치밀하고도 세밀하게 서술되어 있다. 레오 아프리카누스 말고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실존했던 인물들과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 잘 어우러져 있다. 작가가 얼마나 고심해서 이 소설을 썼을지 짐작이 간다. 정말 대단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하산이지만,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종교, 국가, 관습, 사회, 문화, 인종이 다른 집단이 서로 뒤얽히는 상황에서, 죽고 죽이며, 정복하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하루를 버티며 살아내야 했던 그 무수한 사람들의 삶엔 각각 특별한 거대한 운명적 서사가 있었을 것이다. 한 발짝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부질없고 비합리적이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항상 먼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정작 신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 인간들의 모습도 아이러니다.
이 책은 소설인데도 한 권의 역사책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이슬람지역에서 사용하는 여러 용어를 비롯해 소설의 내용에 나오는 지역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고 좋았다. 다만 너무 많은 역사적 내용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묘하게 힘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모든 것이 산화되는 기분이 들어 아쉬웠다. 별로 여운이 남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민 말루프 작가와 비슷한 운명을 가졌던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과 비교되었다. 잔지바르가 혁명으로 인해 탄자니아의 일부로 편입되어 이슬람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어로 글을 쓰는 구르나 작가 역시 자신의 뿌리인 동아프리카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다. 개인적으로 구르나 작가의 작품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한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거늘. 나는 창조주께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창조주께서 내게 빌려주신 시간. 나는 그 시간의 40년을 여행길에서 보냈다. 로마에서는 지혜로운 세월을 보냈고, 카이로에서는 열정적인 세월을 보냈고, 페스에서는 불안의 세월을 보냈고, 그라나다에서는 그저 순수한 세월을 보냈다. -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