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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의 서재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에 들렀다가 시댁으로 온 날, 큰 아주버님은 출장 중이어서 우리를 맞이할 수 없었다. 정이 넘쳐 파도처럼 넘실대는 마음을 가지신 아주버님은 많이 미안해하셨다. 그 미안함과 우리의 결혼을 또 한 번 축하하는 마음을 보태 시댁 가족 모두를 불러 밥을 사 주셨다.

 

식사를 하면서 아주버님께서 주시는 술을 한 잔 받고, 시동생들이 “아! 형수님, 한 잔 하시지요.”하며 건네는 술을 또 넙죽 받고 하며,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정 분위기와 달리 시끌시끌하며 허물없는 시댁의 분위기가 편하고 좋았다.

 

가족 회식을 한 며칠 후,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어머니는 뜬금없이 나에게 “셋째야, 너 술 잘 마시더라(아들 형제 중에 남편이 셋째여서)!”고 하셨다. 난 아무생각 없이 “아, 넷, 근데 그렇게 잘 마시지는 못하는데요, 호홋!”하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에 뼈가 들어있다고 했다. 술로 인한 간경화로 일찍 남편을 잃은(남편 10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되도록 어머니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아니 삼중, 사중적으로 상처, 고통, 지난(至難)함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사람을 기쁘게, 행복하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로인해 또 누군가에겐 평생 가슴에 한을 새겨놓는다.

 

 

언제나 음식과 술에 진심이 느껴지는 권여선 작가의 산문집, 『술꾼들의 모국어』는 술과 음식(안주)에 대한 이야기로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책이다. 보통 음식과 안주는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지만 작가 권여선에게 둘은 분리될 수 없다. 맛있는 음식에 당연 술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음식에 약간의 술이 곁들여지기보다 맛있는 술을 마시기 위해 좋은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p.8)’라고 하니 내가 생각한 게 맞다.

 

술(안주)을 떠나 이 책에 나오는 4계절과 관련된 음식에 대한 작가의 비유는 계속 나의 입 꼬리를 올라가게 해주었다. 그녀가 사용한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단어로, 음식은 곧 시각화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고 거기에 온갖 추억과 오래된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정말 ‘피 투성이’ 만두는 사람을 화나게 하고, 경상도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턱 물회’에 한참 웃었다. 마트에서는 ‘청량고추’라고 표기되는 고추를 작가는 시종일관 ‘땡초’라고 표현했는데, 나의 친정 식구들도 이 고추를 땡초라고 말한다. 반가웠다.

 

음식에 진심이 아닌 나에게는, 평생 음식에 진심인 엄마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엄마 생각이 나 슬펐다. 작가가 언급한 음식 모두에 엄마가 존재했다. 음식 하나마다 엄마의 손맛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엄마도 제사상에 작은 가자미전을 올렸고, 겨울을 나기 위해 말린 시래기를 들통 가득 삶아 하나하나 껍질을 벗겼다. 껍질 벗긴 부드러운 시래기는 들깨를 넣어 나물을 무쳤고, 진하게 된장을 풀어 시래기 국도 끓였다. 엄마는 나물을 좋아하셔서 항상 제철 나물을 상에 올렸다. 가죽 나물 요리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는 그 맛을 몰라 잘 먹지 않았다. 지금 누워 액체 유동식으로만 연명하는 엄마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된장, 고추장, 집 간장이 거의 떨어져가고 있다. 아!, 엄마, 어떡해? 된장, 간장 만들어줘요.…

 

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한다. 음식을 먹고 난 후의 포만감이 넘치면 견디기 힘들어, 조금만 먹으려고 한다. tv의 먹방을 보면 내 배가 차오르는 것 같아 괴롭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며 술을 같이 잘 못 마신다. 술로 금방 배가 차버려 음식 맛을 느끼기도 전에 숟가락을 놓아야 한다. 권여선 작가는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고 했지만, 술, 특히 소주를 마시지 않으니 아직도 나는 잘 안 먹는 음식이 많다. 아무리 노력해도 삭힌 홍어와 곱창, 돼지비계, 순대국은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추운 러시아에는 초콜릿 안에 돼지비계를 넣어 도수 높은 보드카와 먹는다고 하지만, 어쨌든 내 비위에는 맞지 않다.


요즘 친정에 가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대신 언니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나간다. 사진은 추어탕, 삼계탕, 짬뽕, 생선회, 장어구이다.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약간 맵고 뻑뻑한 전라도식 추어탕도 맛있지만, 맑고 시원한 맛의 경상도식 추어탕도 좋다. 여기엔 꼭 산초가루와 방아 잎, 생마늘 다진 것을 넣어야 한다. 친정이 있는 도시의 유명한 삼계탕집의 삼계탕은 여전히 맛있다. 서울에서 먹어 본 삼계탕은 이 맛이 안 나, 서울에서는 삼계탕을 잘 사먹지 않는다. 남편도 인정하는 맛이라 처갓집에 가면 꼭 그 식당에 간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싱싱한 생선회와 장어구이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최근에 발견한 친정 동네 중국집의 해물 짬뽕도 정말 맛있다. 해물도 많이 들어있고, 면발이 얇아 좋다. 국물도 적당히 얼큰하고 맵다. 주인 부부가 요리를 하고 아들이 서빙을 하는 전형적 가족 식당인데, 일단 배달을 하지 않아 맛이 더 깊다.


속초에 가면 무조건 먹는 음식이 물회다. 한 번씩 물회가 먹고 싶으면, 서울에 있는 이 식당의 분점에 가서 물회를 먹는다. ‘턱 물회’는 아니고 그냥 보통으로 시킨다. 차가운 물회와 국수를 먹고 입가심으로 따뜻한 섭국과 밥을 조금 먹으면 속이 더 든든하다.


오늘같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따끈한 칼국수를 자주 먹으러 간다. 주인장이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쫄깃한 면발에, 해물이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면으로만 만든 걸쭉한 칼국수를 좋아한다. 여기에 무조건 다대기와 맛있는 생김치가 있어야 한다. 먹고 나서 1시간쯤 지나면 그때부터 나타나는 짠맛의 여운에 물을 계속 들이켜야 하지만, 먹을 땐 다대기를 넣고 싱싱하고 시원한 생김치와 같이 칼국수 면을 흡입해야 한다. 나중에 후회해도 먹을 땐 그렇게.


이 책의 앞표지 뒷장엔 작가의 사진과 약력이 있고, 그 옆 페이지에 권여선 작가의 친필 편지가 있다. 작가의 깔끔한 글씨체와 반대로 내용은 뭉클하다. 음식, 술, 안주라는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밤새 온갖 사연들을 쏟아낼 수 있다. 거기엔 기쁨과 행복보다는 상처와 고통이 더 많은 삶의 이면이 있을 것이다. 『술꾼들의 모국어』에도 작가의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 아파서, 힘들어서, 힘내려고 한 잔 마시는 것, 그래도 이 땅의 술꾼들이여! 작작 마셔 알코올 중독자는 되지 말며, 술로 인해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다 맥주 한 캔을 사왔다. 요즘 나의 주량의 최대치다. 안주로 부추 부침개를 부쳤다. 마트에서 파는 길고 잎이 넓고 뻣뻣한 부추가 아니라 재래시장에서 할머니들이 파는 키가 작은 부추를 사용해야 한다. 오징어를 듬뿍 넣고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해 땡초는 조금만 넣어 완전 바삭하게 구운 부침개다. 작가님은 부추 부침개의 비주얼을 보고 혀를 끌끌 찰지 모르지만, 맛은 최고다.

 

[변화나 발전도 좋지만 영영 그대로여서 좋은 것도 있는데 저에게는 ‘맛’이 그렇습니다. 저에게 행복을 주는 맛은 언제나 한결같은 의리에서 옵니다. 친구처럼, 오래된 독자처럼.

이 책은 제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메뉴판입니다.

천천히 메뉴를 고르시고, 저와 한잔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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