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재의 다락방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수학의 정석’과 ‘성문 영어‘ 책을 언급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 두 책은 수학과 영어의 필독서였다. 필독서여서 누구나 다 그 책을 샀지만 끝가지 다 본 친구는 드물었다. 책 밑을 보면 항상 앞부분만 검게 변색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하얀 종이 색깔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거의 이 두 책을 보지 않는다. ’수학의 정석‘과 ’성문 영어‘라는 단어로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여고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선행 공부도 하지 않고 그 긴 시간을 마냥 놀았었다. 학원이나 과외도 다니지 않았다. 여고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친구들은 선행을 많이 하고 왔고, 내가 간 학교엔 공부 잘하는 학생을 모두 한 반에 몰아넣는 ‘특별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합고사 성적으로 배정된 그 반에 일단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전교 등수와 반의 등수가 같이 나오는 그 반의 친구들은 모두가 지독하고 극성스럽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담임선생(‘선생님’으로 불러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난 그 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은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자리배정을 달마다 학교 오는 선착순으로 정한다고 했다. 일찍 오는 순서대로 좋은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3월의 학교 입학 다음 날, 난 엄마가 일찍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들고 어두컴컴한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 갔더니 벌써 우리 반의 자리는 거의 차 있었고 모퉁이 구석의 몇 자리만 남아 있었다. 그때 받은 충격적인 느낌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할 수 없이 안 좋은 자리에 앉았다. 담임선생은 나와 내 주변에 앉은 친구들에게 “게으른 놈들”이라고 말했다.
담임선생에 의해 ‘게으른 놈들’이라고 낙인찍힌 우리들은 그때부터 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 다음 달부터 우리는 느지막이 와서 항상 그 자리에 앉았다. 같이 수다 떨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엄청 재미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닌, 단지 자리 하나 때문에 우리들은 열등생이 되었지만, 나름 우정으로 뭉쳐져 인간적인 어른이 되는 밑바탕을 그 시기에 만들었던 것 같다.
당연히 우리 반에 전교 1등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성문 기본 영어를 볼 때, 종합 영어를 봤으며, '수학의 정석 기본'을 볼 때 '수학의 정석 실력'을 보고 있었다. 말수가 별로 없고 수더분한 그 친구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타입이었다. 서울대를 나와 지금은 특목고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때 서울로 유학 와 지금까지 몇 군데의 동네를 거쳐 살고 있다. 대학로에 있는 가톨릭 기숙사에서 산적도 있다(지금 계속 운영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곳에는 여러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서울대 병원이 가까워 서울 의대생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정말 지독하게 공부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 기숙사에 사는 서울대 의대 커플도 탄생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날 때, 이 사람들이 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싸가지가 없는 의사를 만나도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했다는 것은 안다.
요즘은 수학과 영어 참고서의 종류가 정말 많다. 가짓수는 많지만 들여다보면 사실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보는 책과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어떤 책으로 공부하든 기본은 하나다. 알 때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
무슨 운명인지 별로 원하지 않았던 수학과 관련된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요즘은 ‘수학의 정석’을 잘 보지 않지만, 나에게 이 책은 수학의 실력을 올려주기보다 ‘정석(定石)’이란 말을 새겨주었다. 여기서 ‘정석’은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정도를 지키며 꾸준히 자신의 것을 쌓아가는 길’이 아닐까.
알라딘 서재에서 ‘글의 정석’으로, 성실하게 뚜벅뚜벅 가고 있는 멋진 친구들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