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의 전작읽기는 쉽지 않다. 외국 작가인 경우, 모든 작품의 번역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 전작읽기의 범위도 모호하다. 나는 전작읽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그들이 쓴 모든 작품이 다 좋을 수는 없다. 전작읽기라는 목표에 매달려 고생하느니 차라리 다른 새로운 작가를 많이 만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19세기 전반부의 격변하는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인간극>이라는 총칭으로 치밀하게 담고자 했던 발자크는 독자를 현혹시키는 아주 기발하고도 발칙한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인물재등장’ 기법이다. 같은 인물을 자신의 여러 다른 작품에 계속 등장시키는 것이다. 발자크를 그만 읽고 싶어도 다시 등장하는 그 인물이 궁금해 주저앉게 된다. 이러다 국내에 소개된 발자크의 소설을 다 읽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루이 랑베르‘는 『잃어버린 환상』에 잠깐 등장한다. 뤼시앙 샤르동이 파리에서 만난 다니엘 다르테즈가 속해 있는 여러 천재들의 서클에서 루이 랑베르는 리더였지만, 뤼시앙이 그 서클에 가입했을 때 이미 루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상태였다. 뤼시앙과 마찬가지로 지방 출신인 루이 역시 파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루이는 파리 학계 분파들의 싸움, 교육기관의 태만, 가난과 병약함에 의해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외삼촌이 있는 블루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 중의 하나로, 신비스런 천재이고, 그들의 첫 번째 우두머리이고,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는 여러 이유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버렸고, 뤼시앙도 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자주 듣곤 했던 그 사람을 잃고 난 후, 이들은 모두 다르테즈를 그들의 우두머리로 여기고 있었다. -‘잃어버린 환상’, p.243]
‘인간극’중 철학소설로 분류되는 『루이 랑베르』는 발자크의 자전적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루이가 다녔던 ‘방돔 기숙학교’를 발자크도 직접 다녔고, 그곳에서 경험한 것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서술자로 개입하지만, 루이 역시 발자크 자신이다. 스승 없이 혼자서 모든 분야의 책을 섭렵한 루이는 엄청난 기억력과 이해력으로 자연과 우주를 직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뛰어난 유추와 투시력, 상상과 몰입, 집중, 명상으로 현실에서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를 만난다. 그것은 신비주의로까지 연결된다.
루이의 철학적이며 과학적인 사유는 광기와 몽상을 가져와 평범함과 순종을 원칙으로 하는 기숙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의지론』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론을 증명하려했지만 신부에게 노트를 빼앗긴다.
서술자는 ‘의지론’에 대해 설명하지만 이 부분은 상당히 어렵다.
[루이 랑베르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는 근원적으로 영기를 가진 물질이 존재하며, 그것은 기본적인 정신 에너지를 만든다. 그리고 이 물질이 변화되어 ‘의욕(volution)’의 근원인 ‘의지(volonté)’가 된다. ‘의지’는 일군의 힘인데 그 힘에 의해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행위들을 재현한다. ‘의욕’이란 인간이 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그 행위를 말한다. 랑베르에게 ‘사유(pensée)’는 의지의 산물들의 진수를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사유의 본질인 ‘관념(idée)’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관념은 행위를 구성하며 그 행위에 의해 인간은 사유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와 사유는 두 가지 기본능력이며, 의욕과 관념은 그 두 가지 활동에 따른 두 가지 결과이다.(…)
-p.181~182, 역자해설에서]
이러한 이론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신비주의에 대해 많이 서술되고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의 번역자인 송기정 선생이 집필한 『오노레 드 발자크』에서 도움을 받았다.
발자크는 <동물자기(動物磁氣)>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동물자기론은 18세기 말 독일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서머’가 제창한 이론이다. 우주는 보이지 않는 유체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몸에도 유체가 존재한다. 유체의 순환이 원활하면 건강하고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난다는 것이 메서머의 주장이다. 빈에서 추방된 메서머는 파리에서 환영받았고, 그에게 치료받고자 돈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쇠막대기로 환자를 치료했으며 종종 사람들은 신경 발작을 일으켰다.(믿기지 않는다) 1784년 메서머의 제자였던 피세귀르 후작은 ‘자기적 최면’을 발견한다. 최면에 걸린 사람은 투시력을 획득하고 현재와 미래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발자크는 ‘자기적 최면이야말로 인간과 신이 직접 소통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매료당한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로마 교회의 예배 의식에는 반대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발자크는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신비주의’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이자 과학이었다. 1830년대 프랑스에는 신비주의가 유행이었고 수많은 신비주의 단체와 종파가 활동했다. 발자크에게 신비주의는 주술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이 가능한 과학이었다. 그는 과학, 철학, 신비를 분리하지 않았다.
1832년에 집필된 『루이 랑베르』에도 동물자기 이론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루이는 자기 세계에 빠져 경험하지 않고 투시와 통찰만으로 실제를 설명할 수 있다. 루이는 짧은 생의 마지막 시기에 강경증 발작을 일으킨다. 59시간 동안 시선을 한 곳에 붙박은 채 꼼짝 않고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 그의 아내 폴린은 그가 육체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고 말한다.
[폴린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28세의 나이로 죽는다. 『루이 랑베르』는 과도한 지적 활동이 에너지를 탈진시켜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인간 조건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지식 추구가 루이를 광기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중에서]
평범한 사람이 천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와 동떨어져 있고, 광적인 행동들의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을 이끌고 발전시킨 이는 천재가 대다수이다. 천재로 태어나 능력을 잘 펼친 사람도 많지만, 훨씬 더 많은 천재들은 피지도 못하고 좌절했을 가능성이 많다. ‘루이 랑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직관할 수 있는 천재적 기질을 지녔지만 자본주의가 이미 승리한 그때, 그가 파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처세에 약한 사람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현실적 감각이 없는, 머리로만 존재하는 사람은 당연히 불행하다. 그런 사람에게 남는 것은 광기와 죽음뿐이다.
발자크의 소설, 『루이 랑베르』는 소설로서는 재미가 별로 없고 흐름도 매끄럽지 못하다. 발자크는 이 소설로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번 얘기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설움과 방돔 기숙학교에서 보냈던 힘든 생활을 ‘루이 랑베르’라는 인물을 통해 객관화시켜 들여다봤을 것이다. 그 시절 발자크는 엄청난 독서를 했고, 그의 천재적 기질은 이 소설의 주인공 루이와 많이 닮았다. 발자크가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써야만 했던 것이 어쩌면 그를 살게 했을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삶도 루이 랑베르와 비슷한 결말을 맺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무덤에는 이름도 사망 날짜도 새겨지지 않은 초라한 돌 십자가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난 꽃은 미지의 향과 색채를 담고 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심연 속으로 떨어져버렸던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처럼 그 역시 거만하게 자기 삶의 비밀을 모두 내던진 채 무(無)속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p.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