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의 마지막에 감독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답다' 라고. 이창동 감독은 20년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 <밀양>을 찍었다. 감독은 그 과정에 대해 소설이 감독 안에서 계속 숨어있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그럼 우린 감독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소설이 감독의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냐고. 감독은 어느 순간 20년 전에 읽었던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독에게는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걸까. 물론 그 어느 순간에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 과정을 두고 원인과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린 이렇게도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 생각이란 게 감독의 의지로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일까. 감독은 그렇게 시작된 생각으로 영화를 구상했다. 그 전체적인 구상이 감독에게 있어 영화의 설계도가 될 것이다. 감독은 밀양이 아닌 다른 장소를 고를 수도 있었고 결말이나 전개를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밀양을 배경으로 신애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감독의 설계도에 신애는 아들을 잃고 기독교에 귀의했다가 정신병을 얻는다. 종찬은 신애를 만나 지켜보다가 기독교도로 남는다. 도섭은 신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했다가 신에게 용서를 받는다. 영화 속에 들어가 보면 신애는 도섭으로 인해 기독교에 귀의하고, 종찬은 신애를 만나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의 설계도에서는 각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의 계열 사이에 서로 영향은 없다. 단지 신애와 종찬은 그래야만 했고, 도섭 역시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즉 신애의 시간과 종찬의 시간, 그리고 도섭의 시간이 교차되는 것 뿐이다. 이건 다른 인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셋의 시간에 준의 시간, 정아의 시간, 김장로의 시간이 교차된다. 물론 그 등장인물들의 시간과 더불어 용달차의 시간, 노래방 기계의 시간, 거울의 시간 역시 교차된다. 만약 그들과 그것들 중에 하나라도 교차되지 않았다면 영화 <밀양>의 사건들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감독의 설계도에서는 모든 게 그래야만 하고 만약 거울 하나라도 변화가 있었다면 그건 <밀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 밀양 - 최선의 세계|작성자 kenoh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