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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양심 이론은 우리가 태어날 때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마음은 ‘원초아-자아-초자아’로 구성됩니다. 초자아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합니다. 원초아가 인간 육체와 관련된 본능이라면, 초자아는 인간이 사회에서 배우는 규범이 내재된 상징입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자아에 대한 검열자나 재판관 역할을 합니다. 비록 양심의 명령이나 도덕적인 자유의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회에서 형성된 초자아가 검열하는 과정입니다. 자아에게 초자아란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훈육 등으로 생긴 사회의 질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 주장에 따르면, 주체 내면에서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주체의 자유의지라고 볼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은 초자아 기능에 불과하며, 초자아란 시대 요구에 따라 자신 마음에 형성된 ‘흔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 마음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란 단지 시대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 뇌신경과학은 프로이트가 주장한 초자아를 ‘신체표지’(somatic marker)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도, 동의하지도 않는 사이에 신체표지라는 무의식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조용히 판단합니다. 우리는 그런 판단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조차 거의 알 수 없으며, 그런 영향은 신체표지로 신경계에 남아 있다가 우리가 다른 결정을 내릴 때 다시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1944~ )는 신경계에 새겨진 표식이 마치 몸에 새겨진 흔적처럼 의사결정을 내린 사건과 연관되어 기억된다고 말합니다.



신체표지는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그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자신도 모르는 상태로 갑자기 되살아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장단점을 고민해보기도 전에 신체표지는 선택 가능한 목록에서 이미 일부를 제외하지만 우리는 그런 영향을 받았는지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에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신체표지는 감정적 기억이자 뇌가 과거에 습득한 정보를 재예시화한 것입니다. 이런 감정적 기억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작동하다가 비슷한 사건과 맞닥뜨리는 순간에 등장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게 이끕니다. 

 















불교 관점에서도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혹은 무엇을 행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행위를 할 때 어떤 ‘정서 특성’(emotional traits)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느낌이나 행위 자체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나중에 일어나는 절차, 즉 반향(反響)일 뿐입니다. 느낌이 매 순간 활발하게 일어나는 반면, ‘정서 특성’은 행위 결과로 만들어져 개인에게 남아 오래 지속됩니다. 정서 특성은 수동적인 형태로 쌓이고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신체표지나 정서 특성을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아뢰야식은 행위 결과 내지 흔적이 종자(種子) 형태로 머무르기도 하고, 다시 그 종자가 구체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행위로 파생된 에너지가 마음 심층에 쌓여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뢰야식은 개인 자신이 행한 과거의 업(業)으로부터 만들어질 뿐 아니라, 다른 개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 집단을 통해 형성되는 식(識: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분별하여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식이 사회 집단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은 불교가 객관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바로 우리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 무의식은 사회에 지배받고 규정되는 수동적인 산물입니다. 권력이 서로 얽힌 사회에서 인간의 무의식이 만들어지며, 인간의 의식이란 단지 그 무의식이 최종적으로 표면화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자신 의식 안을 들여다봐선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자각하고 인식하는지, 내가 나의 삶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결단하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식적인 생각이든 어떤 의지적인 결단이든 그 안에 무의식이 작동하며, 바로 그 작동방식을 밝혀내야만, 생각과 결단의 본질, 한마디로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불교적 사고가 프로이트적 사고나 뇌신경과학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속 밑바닥에 아뢰야식이라 불리는 숨겨진 성향 또는 잠재적 기질이 있고, 다양한 자극을 받아 이 기질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불교는 이미 오래 전에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신체표지나 정서 특성, 즉 아뢰야식이 일생에 걸쳐 매 순간 퇴적암 지층처럼 쌓여가고, 깊은 곳에 쌓인 지층은 현재의 경험 안에 격하게 분출될 수도, 잠잠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불교적인 사고가 인상적인 점은 이러한 시각이 자기(self)에 대한 가변적인 시각, 즉 무아(無我) 사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의 자아는 <베다>의 아트만과 달리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불교는 영원불멸의 아트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아트만이 없다는 점을 표명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임시 상태일 뿐입니다. 어떤 신체표지나 정서 특성이 심층에 내재하는 동안,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을 갖게 됩니다. 경험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결정하는 아뢰야식은 독특한 경험을 겪고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고, 긴 시간에 걸쳐 퇴적된 잠재 성향은 일련의 습관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학습된 반응에 따라 우리는 순간순간 적절한 방식으로 새롭게 반응합니다. 

















불교는 변하지 않는 단일한 자아는 없으며, 우리는 자신 뜻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의 신체나 느낌, 생각이나 의지, 인식 같은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나의 본질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나의 유전적 조건이나 나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인, 자연적인 환경에 따라 형성됩니다. 따라서 나는 환경 변화에 따라 항상 바뀌어갈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집착할만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바로 해탈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불교는 말합니다.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관용이라는 이타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입니다. 그래서 예로부로 철학의 관심은 ‘존재론과 윤리학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되어 왔지만, 적어도 불교에 있어서 이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체가 갖는 유사성이나 연속성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동일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하고 무아를 부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다음 불교 이야기는 우리가 무아를 깨닫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멀리 가야만 하는 심부름 중에 버려진 집에서 혼자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는 그의 앞에 던집니다. 이내 따라온 다른 귀신이 먼저 온 귀신에게 따집니다. ‘이 시체는 내 것인데 어째서 네가 메고 왔느냐?’ 하니, 먼저 온 귀신이 답하기를 ‘이것은 내 것이므로 내가 메고 왔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온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고 하며 마침내 두 귀신이 서로 시체의 팔을 하나씩 잡고 다투다가 먼저 온 귀신이 제안했습니다. ‘여기 인간이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을 들은 나중에 온 귀신이 물었습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해도 난 죽게 될 것이요. 거짓을 말해도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하여 사실대로 ‘그 시체는 먼저 온 귀신이 메고 왔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온 귀신이 화를 내며 그 사람 팔을 뽑아 땅에 던져 버리니, 먼저 온 귀신이 시체에서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주어 다시 멀쩡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두 팔, 두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모두 시체의 것과 바꿔놓은 뒤 두 귀신은 뽑아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이 때 그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낳아주신 몸을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내 몸은 전부 시체의 것으로 되었으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가, 몸이 없는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모두 귀신에게 먹혔고, 몸이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있지 않은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더니,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렀는데 불탑과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찾아가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신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습니다. 비구들이 도리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그는 ‘나도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소’라고 답하면서 지난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비구들은 그 사람이 무아(無我)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대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사대육신(四大六身: 두 팔, 두 다리, 머리, 몸뚱이 등 온몸을 이르는 말)이 인연(因緣)으로 화합하기에 내 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니, 그대 본래의 몸이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제도해 주니, 그 사람은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온갖 번뇌를 끊고, 이치를 바로 깨달아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성자)이 되었습니다. .

















이와 같은 비유는 불교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학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엄청난 양의 몸 원자를 항상 바닥에 흘리고 다니며 새롭게 만듭니다. 원자와 세포 관점에서 보면, 인간 몸의 90퍼센트는 1년마다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고, 대개 5년이 지나면 몸 대부분 전체가 완전히 교체됩니다(뇌와 심장, 수정체 일부는 예외입니다).



대부분 인간 세포는 7~10년 사이에 대체됩니다. 심장은 매년 18퍼센트 정도가 재생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우리 심장 대부분은 다섯 살이 채 안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입속 미각세포 수명은 열흘이고 피부세포의 대체주기는 39일입니다. 간은 1년에서 길면 2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간으로 대체됩니다. 우리 몸 뼈 전체 생명 주기는 평균 10년 정도입니다. 뇌의 신경세포는 대개 신생아 때 생산되지만, 뉴런이 대내 피질에서 새롭게 나타납니다. 우리 몸 조직은 갓 태어난 세포와 영구적인 세포 그리고 죽어가는 세포가 뒤범벅된 잡동사니인데, 그 갓 태어난 새로운 세포가 비교적 많은 편입니다.



원자가 새롭게 교체되는 주기는 세포보다 훨씬 더 짧습니다. 현재 우리 몸에 있는 나트륨 원자 절반은 1~2주 안에 다른 나트륨 원자로 대체됩니다. 수소와 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탄소 원자들도 한두 달 안에 절반은 사라집니다. 1년 안에 우리 몸 원자의 약 98퍼센트는 공기와 음식, 물에서 섭취한 다른 원자로 대체됩니다. 

















그렇다면 신체는 5년마다 거의 전부 바뀌는데 과거의 내가 현재 나와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기억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연속성’ 이론은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딱정벌레의 몸으로 깨어나는 카프카(1883~1924)의 소설 『변신』(1915) 같은 이야기를 우리가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심리적 연속성’ 이론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딱정벌레가 바로 그 남자라고 인식하는데, 그의 정신이 딱정벌레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지속성이 아니라 정신적 지속성이 나를 ‘나’로 규정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질문의 답은 주로 내가 무엇을 학습하고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은 테이프 녹음기나 비디오카메라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억의 기능은 사건을 나중에 살피기 위해 붙잡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상은 가용한 조각들을 모아 일관된 전체를 구성하는 작업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우리가 마주치는 것을 곧이곧대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치 있다고 여기는 관심사에 따라 의미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기억이나 회상은 나의 관심사가 무엇이냐에 달려있습니다. 관심사는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다시 새롭게 바뀝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십년 전의 나와 똑 같은 사람일까요?
















개인 기억 뿐 아니라 집단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믿는 것만 기억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국가 전사자를 호국영령으로 기림으로써 전사자만 추모하지 탈영병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무명용사의 탑’이나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의 죽음을 특권화 하는 20세기 국민국가 제의(祭儀)는 집단 기억 문화에서 중심을 차지합니다. 



반면에 독일은 탈영병을 ‘반민족적 범죄를 저지른 배신자‘가 아니라 ’반인도적 범죄에 저항한 휴머니스트‘로 기억하기 위해 소박한 수준으로나마 곳곳에 탈영병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전우를 배반하고 조국을 등진 배신자’라는 탈영병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바꾸는 일은 그들에게도 쉽지 않았습니다. 탈영병을 인정하고 이들 명예를 회복시켜주면 다른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02년 독일 의회는 전시 나치가 탈영병에게 내린 유죄 판결을 무효화한 법안을 통과시킨 덕분에 탈영병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임지현(1959~ )은 “당신이 기억하는 역사가 과연 진실“인지 묻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 삶을 지배하는 도덕 원칙을 어떤 상황에서 습득했는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 성격을 구성하는 성향과 취향 역시 무의식적으로 습득됩니다. 인간의 경험에 관한 상당 부분이 무의식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과거 사건에 의해 형성되어 우리의 행동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성향과 습관, 선호가 무의식 기억에 남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억들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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