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산다’
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신이다. 그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내고,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인류의 은인으로 여겨진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창조해 내었기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작품에 붙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와 메리 셸리의 서사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인상적인 영상미,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랑,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진 바 있는 영화로 <물의 모양 shape of water>(개봉작 명칭은 ‘사랑의 모양’)을 떠올리곤 한다. 이 영화를 제작했으며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올해 개봉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한 면도 있는 반면, 토로 감독만의 개성 있는 영상미와 해석이 추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생명의 이면인 ‘죽음’의 문제를 영화에서는 더욱 깊이 고민한 결과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속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고 생명의 에너지를 가미하여 영혼을 불어넣으며 이른바 필멸자의‘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다. 하지만 ‘미리 생각하는 자(prometheus)’라는 이름의 무게와 달리, 끝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한 이 창조자는 피조물의 ‘탄생 이후’에 대해서는 먼저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거역한 죄로 벌을 받아 카프카스 산맥의 한 바위에 묶인 채,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이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인류의 은인으로도 여겨지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 가운데 이 부분에 주목해보면, 창조물은 프로메테우스의 이면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죽음을 정복하고자 욕망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영원히 살아가야만 하는 이 ‘창조물’은 이제 우리 시대에서 범용 AI(AGI)로 변신을 꾀한 것으로 보아도 그럴듯하다. 레이 커즈와일이 제기한 특이점을 넘는 순간에 이 인간의 창조물은 이미 괴물이 되어버릴 것인가, 질문해볼 수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영원’을 살아야 하는 창조물의 가려진 고통과 근원적이면서도 비정한 욕망을 우리에게 이미지의 상징과 은유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원작은 고전으로 여전히 살아남아 현재적 의미에 주목하고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현대인에게 유효한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아름답고 독특한 영상미와 색감이다. ‘기예르모 감독의 색깔’이란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곧바로 떠오르는 색(color)은 크게 4가지다. 토로 감독은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조형요소’로서 색이 지닌 톤과 이 색이 내뿜는 분위기, 그리고 그 색의 상징성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잘 활용하는 감독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선명한 빨강, 순백색, 그리고 몽롱한 초록색과 짙은 푸른색, 혹은 이 두 색이 묘하게 섞인 청록색이 떠오른다. 특히 푸른색과 청록색은 이전의 작품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에서 물과 사랑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공허함과 같은 감성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준 색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토로 감독이 작품에서 사용하는 색은 생의 화려함 생명력, 그리고 그 이면에 가려진 공허함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예감, 혹은 삶과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해서 주변의 모든 이들의 죽음을 보고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로서,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이 쪼이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고통과 고립감, 외로움을 마주해야했다. 정작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말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창조물의 ‘잘못된 만남’은 이렇듯 존재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생명체, 특히 의식을 지닌 생명체에게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을 간접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바닥이 없는 깊고 거대한 두려움. 이는 토로 감독이 늘 배경색으로 보여주는 짙고 무거운 느낌의 푸른색을 떠올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한 가지는, ‘죽음’이란 현상이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에게는 우주가 선사한 ‘쉼/휴식‘의 시간이란 생각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창조물’이 ‘나를 끝낼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을 따라다니며 ‘죽음’을 갈망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이제 삶이 권태롭거나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만이 존재에게 더 큰 중요성을, 혹은 유일하게 중요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 피할 수도 없이 ‘중년’이 되어버린 내게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공통적으로 내게 한 가지 교훈을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 후에 상대방을 정성스럽게 애도하고 추모하곤 하지만, 살아있는 나에게‘지금’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상대방이 나를, 우리를 떠나기 전에 ‘당신이 나와 함께해서 좋다, 함께 해주어 고맙다’고 얼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자주 그리고 가볍게 말이다.

[종이 인형(메리 셸리) 협찬: 구슬 @kooseul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