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생애가 아름다운 감각들로 충만한 기억이기를
- 《디어 올리버》
: 두 신경과학자가 나눈 우정, 감각,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시선
수전 배리+올리버 색스 지음
김하현 옮김 [부키] (2025)
한동안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손에 쥔 책들은 얇은 책이거나 편지를 엮은 책이었던 것 같다. 화가 세잔과 작가 에밀 졸라의 30년 넘는 우정이 담긴 《교차된 편지들》에 이어서 이번에는 두 신경과학자가 10여 년간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은 《디어 올리버》를 읽었다. 올 여름 집안의 어르신을 떠나보낸 후 황망하고 헛헛한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었던 책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수신자, 곧 독자가 분명히 정해진 서간문이 지닌 고유한 친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편지는 지금 내 곁에 부재한 대상을 다시 불러들이고 당신과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일 터다. 그러므로 서간문은 쓰는 이의 상실, 결핍을 전제로하며 지금 내 옆에 있지 않은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흔적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8월 30일)은 신경과학자이자 의사인 올리버 색스의 10주기가 되는 날이기에 이 책을 읽고 난 인상은 더욱 특별하다. 그의 기일에 맞춰 출간된 이 편지글에 그와 우정을 나누었던 또 다른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 미래의 독자에게 전해진 셈이다. 책의 또 다른 저자인 수전 배리는 신경과학자로, 올리버의 말년에 10여 년 간 편지와 만남을 통해 삶과 연구 주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던 멘토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삶에서 이런 대상을 만나기란 얼마나 드물고 어려운가.
한편 무엇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수전 배리의 시각과 관련한 경험이었다. 50여 년간 단안시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수전이 훈련을 통해 입체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한 존재가 새로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존재론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어린 시절에 단안시를 지닌 사림이 성인이 되어 입체시로 된 사례가 없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러니 이 사연을 흥미롭게 여긴 올리버가 수전을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은 평생 호기심을 잃지 않았던 올리버다운 행위였다. 이처럼 올리버의 호기심은 지구인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상대를 단순히 조사 대상으로서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상대를 보다 순수하게 인간이라는 ‘동료’로 관심을 갖고 상대를 인정해주었다는 점이 달랐다. 수전이 바라보기에 올리버는 누구든, 혹은 어느 것에든 관심을 주었던 사람이었나 보다.
“올리버의 관심과 공감을 받지 못할 만큼 시시하거나 사소한 것은 세상에 없었다.”(92)라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가 직접 수전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대목도 있다. “우리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아닌 좋은 파트너였습니다-정말로요. 제게도 전례 없는 경험이었습니다.”(124)라고 편지의 수신인에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올리버는 자신이 관심을 나누어 준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만의 고유함을 인정해주는 인물이었다.
두 신경과학자 수전 배리와 올리버 색스는 수전이 나이 50세 즈음 획득한 입체시에 대한 경험을 올리버에게 전해준 2004년 즈음부터 교류를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머지않아 올리버는 망막에 종양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수전에게도 알렸다. 10년 후에 올리버는 안구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소식을 역시 편지로 수전에게 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수전 배리가 나이 50세 즈음 단안시로 살았다가 입체시를 획득하며 ‘갑작스러운 환희의 순간’을 맛보기 시작했던 반면, 올리버는 이와 반대로 70 년 가까이 입체시로 살다가 한쪽 눈에 생긴 종양으로 시력을 잃게 되면서 단안시로 되어갔다는 사실이다. 수전의 표현대로 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방대한 공간감’을 만나는 동안, 올리버는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으로 압축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셈이다.
올리버의 생애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자 정성을 다하고, 그 삶을 매순간 기념하듯 살았다는 점이다. 10여 년 옆에서 올리버를 지켜보았던 수전은, 그가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 나가는”(140) 사람이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올리버 자신도 이렇게 편지에 남기고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제가 열심히, 꾸준히, 의욕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정도지요.”(140) 종양으로 시력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올리버의 삶, 그리고 매 순간 그가 삶의 주체로서 선택했을 행위들을 떠올려본다. 그에게 글쓰기는 매일 거르지 않는 끼니처럼, 혹은 쉬지 않고 발을 내딛으며 걷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세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각자 나름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정보가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저마다 다르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감각의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폄하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수전과 올리버가 주고받은 편지글은 오랜 우정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존재가 함께 만들어 나간 충만한 감각의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각과 관련하여 두 사람이 극적으로 상반된 방향으로, 극적으로 다르게 인식되는 현실을 경험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였기에 더욱 숙연해지기까지 한 읽기 경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우리가 매일 누리는 감각의 향연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일찍 이해하고 있었을 테다.
두 신경과학자가 주고받은 편지글에는 늘 상대에 대한 진심과 귀 기울임이 보이는 듯했다. 상대와 마주하여 진심으로 연결되고, 또 연결되기를 희망하던 두 주체가 서로 조응하며 변해가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진심이 담긴 한에서 편지글은 어느 한 사람만이 영향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 모두 함께 변해가는 ‘공진화’가 수반되는 과정이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어떤가.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사회다. 때론 이 연결됨이 지나쳐 보인다. 올리버는 전자 기기와 네트워크에 지나치게 연결된 나머지 내적인 사생활이 사라진 세대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은 사생활과 자유로울 수 있는 ‘내면의 빈 공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나아가 이렇게 전자 기기에 연결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눈과 귀를 닫는 것 같다고 올리버는 우려했다. 성인이 된 누군가에게 어린 시절,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일종의 배경 음악처럼 작동하는 기억이야말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올리버와 수전이 나누었던 교감과 신뢰의 대화는 우리가 유한한 생애동안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아름다운 감각으로 채워진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수전이 쓴 편지 가운데 아흔이 넘은 아버지의 임종에 관한 언급이 생각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잠들지 못하던 어린 자녀들(수전과 오빠)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아이들을 재워주었던 아버지였다. 음악을 들을 때 음마다 뚜렷한 색을 떠올리는 ‘공감각’을 지닌 수전에게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는 어느 것보다 소중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상함이 함께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바이올린 음악 소리가 “어린 시절의 배경음악”(351)이었다고 올리버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감각이 남겨준 기억은 부재한 아버지와의 연결됨을 유지해주는 ‘마들렌’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올리버가 사망하기 몇 주 전인 2015년 8월 9일자 편지는 수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몸이 극도로 약해져 지인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써 내려간 이 편지에서 올리버는 수전을 알게 되어 기뻤으며 그녀와의 돈독한 우정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수전의 편지는 늘 즐겁게 받아보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 제 삶에 추가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82)
올리버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던 것일까. 같은 달 30일에 그는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오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느 독자는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 속의 단어를, 그리고 그의 마음을 상상해보고 있다. 이 마지막 편지에서 올리버는 평소에 쓰지 않던 ‘친애하는’(Dear)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에 눈길이 갔다. 생전에 자신이 쓰는 글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까다롭게 고르던 올리버의 습관을 떠올려본다면, 이 표현은 수전과 나눈 우정과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나 역시 가족 한 명이 병으로 주저앉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던 모습을 지켜본 이번 여름의 시간을, 올리버와 수전이 나눈 마음들로 위안을 얻고 지나올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들에게 남은 삶이 아름다운 감각으로 충만하게 기억되길 바란다.
[책속으로]
[1] "장애를 극복하면 힘들게 얻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된답니다."(60, 수전의 편지)- P60
[2] "올리버가 관심을 보이며 내 경험을 인정해 주자 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70)- P70
[3] "내 이야기를 검토하고 정리하고 결국 책으로 낼 수 있었던 건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환자에서 주체로, 다시 저자로 변신했다."(81, 수전의 편지)- P81
[4] "올리버의 관심과 공감을 받지 못할 만큼 시시하거나 사소한 것은 세상에 없었다."(92)- P92
[5] "역에서 한낮의 햇빛 속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갑작스러운 환희의 순간이 찾아왔어요. (...) 길 건너편 건물의 둥근 파사드가 저를 향해 불룩 튀어나와 보였어요."(105, 수전의 편지)- P105
[6] "우리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아닌 좋은 파트너였습니다-정말로요. 제게도 전례없는 경험이었습니다."(124, 올리버의 편지)- P124
[7] "올리버는 어떤 질병이나 장애를 이해하려면 과학과 심리학, 역사, 철학을 폭넓게 아우르며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책을 통해 내게 알려 주었다."(133)- P133
[8] "(...)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자신이 치료하고자 하는 질병을 전부 경험해봐야 한다..."(137, 올리버가 재인용한 몽테뉴의 말)- P137
[9]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제가 열심히, 꾸준히, 의욕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정도지요."(140, 올리버의 편지)- P140
[10] "나는 그때, 그리고 훗날에도 여러 번,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 나가는 올리버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140)- P140
[11] "입체시가 내게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일인지를 보는 즉시 알아차렸던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입체시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은 슬픈 아이러니였다."(203)- P203
[12] "피아노를 조율하려면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요."(212, 수전의 조율사가 수전에게 해준 말)- P212
[13] "올리버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 중에서 두족류, 즉 앵무조개와 오징어, 문어, 갑오징어를 가장 좋아했다."(249)- P249
[14] "제 어머니가 78세에 돌아가셔서, 저는 78세라는 제 나이에 어떤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이 부디 고관절 골절에 만족했으면 좋겠습니다."(302, 올리버가 편지에 남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 P302
[15] "그 말은 사실상 학생들에게 내적인 사생활이 없고 뇌의 ‘디폴트 네트워크’가 자유로울 수 있는(상상에 빠지거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내면의 빈 공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 이처럼 전자기기에 ‘연결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눈과 귀를 닫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연결을 끊는 것이지요."(327, 올리버의 편지)- P327
[16] "아마도 ‘생존’기간을 6-9개월에서 15-16개월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늘린 몇 달이 좋은 시간이라면, 그 동안에 글을 쓰고(일부 또는 거의 다 쓴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조금) 여행을 다니고, (철없이 군다거나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361, 올리버의 편지)- P361
[17]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 제 삶에 추가적으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382, 수전에게 보낸 올리버의 마지막 편지)- P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