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성공하기로 할 것인가, 실패를 선택하고 책임을 질 것인가?’
-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 풍경을 조명한 희곡
<오펜하이머 청문회>
하이나어 키파르트 지음
양도원 옮김 [지만지드라마] (2024)
“(원폭실험을 하던) 그때 나는 두 가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실험이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 실험이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오펜하이머가 보안청문회에서 언급한 말)
“눈을 떴을 때 나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광선이 눈부시도록 하얀 불덩어리가 되어 점점 커져서는 하늘과 산을 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그때 가지고 있었던 힌두교의 찬가에 나오는 두 가지 시구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수천 개의 태양으로 된 햇빛이 하늘에서 홀연히 비친다면’ 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는 모든 것을 삼키는 죽음이다. 세계를 모두 흔들어 놓는 자다’였습니다.”
올해(2025)는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가운데 의식 있는 꽤 많은 시민들, 심지어 명사들 마저도 우리의 광복이 미국의 덕분이라고,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 폭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의 기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표현으로 정리해버리고 마는 이들이 내게는 온전한 인식을 갖춘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 까닭이다.
1945년 초부터 일본 군부는 연합국 측에 항복 의사를 비공식적으로 타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군부는 원자 폭탄의 위력을 실제로 사용해서 위력을 검증하고자 결정을 내린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문제가 있다. 미국의 역할 없이는 우리의 광복이 분명히 쉽지 않았을 테지만, 우리가 국외에서 활동하던 임시 정부와 국내 진공 작전의 준비, 그밖에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목숨 건 투쟁과 희생, 여기에 더불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이들의 희생을 놓쳐서도, 잊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세의 도움만으로 무기력하게 독립을 얻어낸 것이 결코 아니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지우려는 세력은 바로 이런 부분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 군부가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한 우라늄과 플루토늄 기반의 원자 폭탄은, 일본에 대한 승리를 목적으로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나치 독일이 먼저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전에 미국에서 개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먼저 패망한 후 개발된 원자 폭탄 제작 사업은 사라진 초기의 목적 대신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을 터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에서 지적하며 이후의 수소 폭탄 계획에 비판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원자 폭탄 제조 이후 수소 폭탄 제조로 경쟁하듯 이어지는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사업은 그 한계 설정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성격을 간파한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개발 경쟁이 결국엔 인류의 실존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미 군부가 우리의 독립에 관심을 두고 있기 보다는(이건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부수적 효과에 불과하다) 한 때 손을 잡았고 일본과 싸웠으나 이제는 적대 국가로 부상한 소련(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의 측면이 더 중요했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미국 내에서 거세지고 있는 반공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불길한 사건으로 볼 수 있을 터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이자 극작가 하이나어 키파르트의 희곡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관심 있게 읽으며, 영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보았던 오펜하이머 청문회 과정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시작한 보안청문회의 기록을 바탕으로 원자 폭탄 제조 계획(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었던 오펜하이머가 얼마나 고립된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만들어진 신’과 같은 국가라는 실체가 개인에게 가할 수 있는 국가 폭력의 메커니즘과 더불어 오펜하이머 개인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은 지극히 복잡하고 다층적인 존재인데 말이다. 분명하게 무언가를 경계 짓고자 개인을 강요하고 폭력적으로 재단할 때 그 공동체에는 무엇이 남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희곡 대본은 단순히 공적 인물로서 오펜하이머의 고난과 희생의 국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가 마주해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과 강요된 선택의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고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국가 주도 사업(첫 원폭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여부에 대한 공인으로서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공동체에게 큰 영향력을 지닌 한 인간이 갖게 되는 무거운 책임감과 윤리적 결정의 경계에서 주저하던 인물의 내면을 상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만, 과학자의 책임 문제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투하된 무기에 희생된 일본인들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무기를 투하할 만한 지점을 선정하는 데 과학적⋅기술적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언뜻 이해가지는 않지만, 그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적인 양심과 국가 혹은 공동체를 위한 공인으로서의 행보 사이에서 주저했을 법하다. 그는 과학적/기술적 정보만을 제공한 것이라 말했다. 최종적인 결정은 정치인들이 내린 것이라고 선을 긋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의 책임은 면제되는 것일까? 정답은 없지만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애초에 폭탄 제작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하더라도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만을 가지고 그를 비롯한 당대의 과학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또 개개인의 복잡한 심리와 입장 차이에서부터 국가 간의 민감하고 첨예한 이해관계 등을 고려할 때,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결정과 행동이 늘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학 활동이 수행될 때, 이는 이미 과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을 넘어 공적인 역할을, 다시 말해 정치적인 결정을 수반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책임을 온전히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현대 과학 연구는 특성상 개인의 아마추어적인 유희적 특성을 훌쩍 뛰어 넘어 버린 지 오래다. 공공에 대한 의무, 공적 특성과 보다 많이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의 책임은 그가 속한 사회, 나아가 지구 위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성공적으로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내었으나, 이후 이어지는 (원자 폭탄 위력의 1만 배 이상 강력한)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매카시 광풍의 희생자가 되었다. 개인의 모든 사생활이 낱낱이 파헤쳐 공개되었다. 이후로도 오랜 세월 감시 및 도청당했으며, 학자로서의 길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사실상 막혀버린 셈이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잠시 언급된 수소 폭탄 개발과 사용에 있어서, 만약 한국 전쟁 당시에 한반도에서 수소 폭탄이 사용되었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오펜하이머 청문회>에 언급되는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의 핵무기 중에서 현재 러시아에만 핵무기가 1만 여기, 미국에는 9000 여기가 있다. 오펜하이머의 우려대로 전 세계의 핵무기 경쟁에는 상한선이 없어졌던 셈이다. 핵무기 경쟁에서 유일한 제약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오로지 폭탄 제조에 필요한 원료의 수급가능성 밖에 없는 듯하다. 이제 우리 인류는 잠재적 인류 공멸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올해 80주년이 되는 광복절을 맞아 눈에 들어와 읽게 되었으나, 영화 <오펜하이머> 보다 오펜하이머가 겪어야 했을 개인적 고통과 청문회의 풍경을 좀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텍스트였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여겨진 국가 주도 사업의 책임자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성취해내면 인류가 위기에 처하게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때, 당신은 ‘일단 성공하고’ 볼 것인가,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류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음에 안도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겠는가. 여기에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좀 더 높은 기댓값으로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은, 오펜하이머라면 또다시 똑같은 행보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