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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夢)슈슈 무민의 밝은 방
  • 천사들의 엄격함
  • 윌리엄 에긴턴
  • 20,700원 (10%1,150)
  • 2025-01-24
  • : 4,490




동일한 실재는 없다 -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원제: The Rigor of Angels)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까치] (2025)

   



종종 한 권의 책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천사들의 엄격함》을 읽고 나서 입가에 맴도는 단어는 백일몽이라는 단어다.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세 사람-칸트,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을 중심으로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서였다. 저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세 사람을 어떻게 주목하고 연결짓게 되었을까 놀랍다. 이 책에는 근대 철학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문학가이면서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양자 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이 이 책에 모여 연결될 수 있었던 단초는 철학자 칸트가 제공했다. 칸트의 사상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창구이자 세계로 통하는 채널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소환한 사상가 세 사람은 바로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실재’란, 존재에 의해 감각되어 재구성된 이미지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실재란, 측정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고, 칸트 역시 바라보는 존재(주체)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언급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저자가 보르헤스나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칸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주목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생생한 인물의 모습으로 되살려 놓은 부분이다. 실재의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역사 일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느낌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은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 ‘실재하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는 존재와 우주의 근거를 설명하는 본질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이 단순히 철학과 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을 마련해주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인간이 파악한 ‘실재’란 같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에게도 이 ‘실재’란 같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각 존재에 의해 구성된 실재는 각 주체가 세계로부터 추출한 극히 작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파악된 실재’는 결코 실재와 동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체에 의해 파악된 실재의 이미지가 실제의 ‘실재’와 동일한 경우 그 주체는 자유를 잃고 그 ‘실재’에 구속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놀라운 능력과 반대로,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기억’ 혹은 ‘완벽한 재현’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는 내부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조화하는 기능이 필요할 듯하다. 결국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로부터 흡수한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추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양자 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행렬 역학’으로 양자 역학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화의 방법’이었다. 그는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지식이나 현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영역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중간 지대’에 가까운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핵이나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와 다르고 때론 논쟁도 벌였던 닐스 보어, 이보다 더 큰 견해차를 지니고 대립했던 아인슈타인과도 ‘중간 지대’를 유지한 점에 주목해 본다. 이‘지대’는 그와 이 영역 내에서 공존했던 이들에게 서로의 논리를 다듬고 재점검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 지대’는 견해차에 따른 상대방을 배제하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지대’는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가 언급한‘실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주체가 파악하는‘실재’는 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실재’가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중간 지대’는 단지 학문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를 위해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혹은 의식 있는 주체에게 필수적인 요건 혹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가 경직되고 메말라가는 지금, 기후 정의와 같이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전후 하이젠베르크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동료 과학자이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님 모두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구드스미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연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구드스미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거둔 것은, 어쩌면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드스미스 자신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실재’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그만의 ‘실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실재’의 개념을 마찬가지로 적용하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사상가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에 영향을 주었고, 실재를 파악할 때 실재의 본질이 이를 바라보는 이, 곧 주체에 달려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각자는 세계라는 이미지가 통과하는 다른 렌즈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현대 물리학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집단과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일단 현대 물리학계의 실험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해석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은‘자유의지’라는, 사상사의 오랜 주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생각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 세 명의 지식인들을 ‘실재’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저자의 통찰과 안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독서였다.

 


 

#천사들의엄격함 #윌리엄에긴턴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철학책 #철학책추천

[1] "입자가 취한 경로는 입자를 관찰하는 우리의 행위,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25, 하이젠베르크의 말)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 하이젠베르크의 말)
- P25
[2]"사실 영혼이나 의식은 시간에 걸쳐 존속하는 통일된 자아감이다. 영혼 또는 의식이란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지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바로 이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다."(77, 칸트의 입장)
- P77
[3]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세계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형성해야 하는가를 항상 비판적으로 조율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자연스럽게 끌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우리 자신을 붙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79)
- P79
[4] "실제 운동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80, 제논의 역설에 대한 헤겔의 반박)
- P80
[5]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89,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89
[6] "우리는 무엇을 관찰하기로 정했는가에 따라서 실재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볼 수 있고 두 가지 측면은 서로를 보완하지만, 실재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124, 닐스 보어의 상보성)
- P124
[7] "우리의 근본적인 비결정론 가설은 실험과 일치합니다."(127, 코펜하겐 해석을 낳은 보른과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127
[8] "외부 세계는 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연구는 아름답습니다."(146, 하이젠베르크가 1935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P146
[9] "시간은 상실이다. 시간은 비통함이다. 시간은 영원함에 대한 욕망이다."(190, 보르헤스의 <알레프>에 나타난 시간에 대한 통찰)
- P190
[10] "확률적으로 모든 것이 생겨날 수 있으니 우주에는 정말 독창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211, 글쓰기 주제로 카발라를 택한 보르헤스의 말)
- P211
[11] "세계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는 유한하므로,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면 가능한
순열의 수가 소진되어 우주는 되풀이될 것이다."(212, 니체의 입장)

"니체의 초인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우주적 부조리에 용감히 맞서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똑같은 삶을 기꺼이 반복적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였다."(212)
- P212
[12]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고, 그 구체는 한가운데가 어찌 되었든 육각형이며, 구체의 바깥 둘레에는 도달할 수 없다."(222)

"끝없이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보르헤스에게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심이고, 그 둘레, 그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감싸는 점이자 기원은 어디에도 없거나, 적어도 도달할 수가 없다."(224)
- P222
[13]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단순히 실험 자료를 해석한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한 법칙을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재를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이었다."(244)
- P244
[14] "숭고는 우리가 만든 세계 표상에 대하여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반작용이다."(282)

"숭고라는 미학적 감정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과 우연성에 둘러싸인 존재의 울타리를 벗어나 절대적인 어떤 것 – 광활한 우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의무 – 을 그려볼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생겨난다."(286)
- P282
[15] "인간의 이해력은 무한하다.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들에 관해서까지도."(286,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286
[16] "자유의지는 형이상학적인 이식물이나 위대함에 대한 망상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쉬움에 대한 인정이다."(297)
- P297
[17] "그만 하면 됐네(Es ist gut)"(313, 칸트의 마지막 말)
- P313
[18] "시간과 세월의 담요에 감싸이기 전에 칸트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흡수한 것으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뽑아내고 추상하는 능력은 그 존재에게 자유를 그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행동 과정을 결정하고 선택을 판단하는 능력을, 더 나아가 필요성을 부여한다."(315)
- P315
[19] "(양자가 취하는 경로는) 우리의 관찰, 오로지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31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317
[20]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35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양자 역학의 역설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을 신의 눈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에 일치시키려는 시도로부터 생겨났고, 그것은 애초에 우리의 관점이 아니었다."(357)
- P357
[21]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지금 이 삶을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선택한 하나의 길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판단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을 안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했었을 행동, 해야만 했을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다."(367)
- P367
[22] "사실,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구드스미스)가 내린 면죄는 하이젠베르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368, 마지막 문장)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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