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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夢)슈슈 무민의 밝은 방
  •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 카지이 노보루
  • 18,000원 (10%1,000)
  • 2023-11-11
  • : 693



한 일본인 교사가 남겨 놓은 희망의 씨앗

 


카지이 노보루,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정미영/박소영 옮김, 몽당연필, 2023

 



코로나19가 급속하게 전파되던 2020년 3월 즈음 읽었던 기사 한편이 기억난다. 일본에 있는 어느 중소도시에서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에 코로나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배포하면서 조선학교 유치부를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내용이었다. 내 눈을 믿기 힘들었다. 이건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4년 전의 기사였다. 21세기에 공공기관이 ‘솔선수범’하여 배제와 차별에 앞장서는 졸렬함이라니! 심지어 기사는 시 직원이 ‘(조선인은) 마스크를 다른 곳에 팔아넘길지 모른다’는 취지의 폭언도 스스럼없이 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관련 사건에 대한 사설을 읽어보았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은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깝게는 2013년 아베 신조 정부의 ‘고교무상화’정책과 관련한 사례가 있었다. 이 정책은 고교수업료를 무료화 하겠다는 취지라 명목상 많은 일본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정책에 조선학교만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데 있다. 나아가 이를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차별을 제도화한 것은 우려스러웠다. 이 조치는 몇 년 전 조선학교 유치원 및 보육원에 인도적 차원에서 마스크를 배포하는 일에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한 근거가 되었다. 일본 사회에 염치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제는 왜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학교에서 5년 간 근무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책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를 읽으며 내내 궁금했다. 저자 카지이 노보루는 일본이 패망한 후 재일조선인들이 교육 현장에서 겪었던 수난과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겼다. 귀한 기록물이다. 그가 조선인학생들과 함께 한 경험들은 단순히 교육 현장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2020년 당시 조선학교 유치원생들에게 공공기관이 주도한 ‘합법적’ 차별은 훨씬 복잡하고 광범위한 문제와 얽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학교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무엇보다 일본의 정치권과 공권력, 권력의 눈치를 보고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언론까지 가세하여 만든 총체적 결과물로 응어리진 결과다.

 

일본의 패망 후 연합군사령부(GHQ)의 교육담당 장교 듀렐이 도쿄의 조선인학교를 시찰하며 “개 잡듯이 죽여야지.”(62)라고 했던 대상은 누구였던가. 그리고 조선인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고, 조선인학교 문제를 ‘치안 문제’로 이야기하던 이들은 누구인가. 저자가 같은 일본인으로서 이러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낀다는 대목에 눈길이 멈추기도 했다. 나아가 일본 식민주의 지배세력의 조선인 혐오, 그리고 미국의 세계패권 야욕과 철저한 반공주의가 결합하며 찾은 희생양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1951년 2월 28일 오전 6시 30분에 무장한 경찰 예비대대 520명이 도립조선중고등학교 건물과 기숙사에 침입했다. 훗날 이 사건을 ‘2·28사건’이라고 불렀다. 도둑처럼 학교에 급습하여 학생들의 교과서나 숙제, 미술작품, 수첩까지 압수하며, “조선인은 싹 다 죽여야 해.”(75)라고 고함치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곤봉까지 휘둘렀던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자가 당시의 광경을 묘사한 이미지를 “군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의 일본의 모습과 겹쳐놓으면 아마도 어긋난 곳을 찾기 힘들 것”(77)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은 또다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올해로 101주기를 맞은 간토대학살 사건(1923년 9월)이었다. 일본 군부의 주도하에 일본자경단들이 일본도뿐만 아니라 죽창으로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사건이 아니었나. ‘그들’의 구호가 “조선인을 다 죽여라!”였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조선인학교의 폐교는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현재 및 미래의 타자를 숙청하는 방법이었다.

 

엄혹했던 일본의 식민지 시절, 한인들은 일본의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사람들도 있지만, ‘힘든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패전 후 조선인들에 대한 속죄는커녕, 보상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를 지우는 일에 몰두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흔적지우기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정황을 엿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등한 대우를 말하며 동일한 책임을 요구했지만, 조선인들은 정작 받아야할 혜택에서 언제나 제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대의 젊은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중학교에 부임하여 마주했던 것은 학생들의 냉냉한 시선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일 조선인들의 박탈감을 이해해야 넘을 수 있는 선이었다. 조선인학교에 온 신임 일본인 교사들은 ‘달아매기’라는, 학생들의 불신어린 심문을 받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자신들의 학교를 망가뜨렸다는 반감으로 가득한 학생들로부터 일본의 문부성 및 교육위원회의 스파이로 간주된 것은 저자가 조선인학교에서 처음 마주한 현실이었다.

 

조선학교에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배포하지 않은 사례 역시 저자가 그토록 맞서 싸웠던 조선인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학교에 일어났던 일, 그리고 몇 년 전 조선학교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단순하고 충동적인,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던 셈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야만으로 치달은 전쟁의 최대 희생자였다. 이를테면 식민주의, 제국주의/군국주의, 반공주의 등의 이념이 인류에게 가한 폭력의 세계사적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된 대목 하나는, 조선인학생들을 위한 민족교육에 대해 저자가 성찰한 대목들이었다. 조선인에게 올바른 민족교육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자는 “조선인학교 문제가 곧 일본의 교육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119)을 간파하고 있던 소수의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 아이들 12만 명의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한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을 아래에서 엿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 교육 문제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로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로서, 일본의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 관련되었음을 중요시 해야만 한다.”(138) [홋카이도에서 온 요시다 하츠미 씨의 언급 재인용]

 

여기에서 교사는 교육자로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문제부터, 가해국 국민으로서 피해국의 국민과 평화를 위한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배경에 속한 집단의 친선을 도모하고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서로 존중하는 일이 우선 요구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치유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흉터는 남아도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줄곧 추구하던 민족교육의 문제는 양국의 건강한 평화와 독립을 위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이런 지점까지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같은 인간으로서 후손인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비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학교의 일본인 교사 1950-1955>는 교육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통해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따라간 여러 일본인 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조선인 교사와 조선인학생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립조선학교는 결국 1955년 3월 31일부로 폐쇄되었지만, 이 책이 남겨놓은 것은, 결국 희망의 씨앗이라 여긴다. 저자 카지이 노보루를 비롯한 여러 참여 지식인들의 존재 덕분이다. 그가 남겨 놓은 이 씨앗이 책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계속 전달되고 읽히고 기억된다면, 언젠가 새롭게 싹이 트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감해본다.





[책 속으로]

[1] "새로 채용된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인들의 분노와 슬픔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 한 학교에 교장이 둘이나 있는 이상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된 것은 조선인학교에 근무하고 나서다."(24)
[2] "그 아이들이 일본에 영주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이미 역사를 통해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인이 원해서 조국을 버리고 일본에 온 것이 아닌, 힘든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도일한 이가 많기에 조선이 평화롭고 완전한 독립국만 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35) [도교육위원회에 제출한 청원서 재인용]
[3] "선생님! 우리는 조선인이에요.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말도, 나라도 빼앗겼어요. 얼굴은 조선인이지만, 조선말도 역사도 모른 채 살아왔어요! 선생님, 누가 선생님에게 일본어를 써도 안 되고 배워도 안 된다면서 학교 문을 닫아버리고 감옥에 집어넣으면 화가 나지 않겠어요?"(41)[일본인 교사 S의 기록]
[4] 4·24 교육 투쟁-재일조선인연맹 강제해선-전국 조선학교 폐쇄-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필름 위에, 남북의 분단과 일본 국내에서 미 점령군의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비민주적 행태를 아무런 설명도 수식도 없이 겹쳐놓고 보았을 때, 내 나름대로 도립조선인학교의 위치에 대해 깨닫게 된 것 같다."(62)

"문부성이 ‘조선인학교는 학교교육법에 따라 사립학교로 취급할 것’(1948년 5월)이라는 통달을 발표한 직후, 도쿄도 내 조선인학교를 시찰하러 온 GHQ 도쿄군 교육담당 장교 듀펠은 군홧발로 교실에 들어와 김일성 초상화를 보며 "개 잡듯이 죽여야지."라고 중얼거렸다. 조선인에 대한 감정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도 드물 것이다. 그는 교원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의 숙청을 강하게 추진했던 자타공인 철저한 ‘빨갱이 혐오자’였다." (62)
[5] 아이들을 교실로 들여보내려 한 교사에게까지 "교사면 다야?", "감히 국가 권력에 불만을 품어?", "조선인은 싹 다 죽여야 해."라고 고함쳤습니다."(75) [3·7사건에 대한 기록 재인용]
[6] "수색 영장도 없이 3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해 무기 하나 없는 학교에 쳐들어와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에 과연 어떤 이유를 댈 수 있을까. 게다가 무저항 상태의 학생들과 사태를 수습하려던 교사들까지 폭행한 것은 물론이며 신문사 카메라맨과 의사까지 폭행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폭력단이나 다름없었다."(77)
[7] "인식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면 스스로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99)
[8] "지금까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 놓여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인식함과 동시에 현재 일본이 처한 상황과 겹쳐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피압박 민족의 해방 문제로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로서, 일본의 평화와 독립의 문제와 관련되었음을 중요시해야만 한다."(138)
[9] "내가 상당히 고심해서 완성한 구상은 두 가지 기둥으로 이뤄졌다. 첫째, 고교 이하는 의무교육으로 하고 운영도 공비로 하지만, 교육 내용은 재일조선인이 자주적으로 실시하는 것, 둘째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지키는 일이 일본인의 민족교육을 확립하는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142)
[10]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시설 등 제반 운영에 필요한 조건 마련은 일본 정부가 하고, 교육 내용과 조직을 만드는 일은 조선인 스스로 책임지고 확립해 가는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재일조선인 교육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44)
[11] "일본의 아이들이 풍요로운 일본인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아이들도 역시 풍요로운 조선인으로 자라나야 한다. 게다가 그것은 과거에 대한 속죄로서 일본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토록 단순명료한 논리가 5년간에 걸친 조선인학교 생활을 지탱해준 논리다."(206)
[12]"언어가 가장 고도로 승화된 것이 문학작품이라 생각한 점과 난독 학습을 하다 보니 36년간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의 비극을 맞은 조선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확실한 실마리가 문학 속에 훨씬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그 무렵부터 다시 20년이 지났다. 나의 공부는 마치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하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조선을 알아가는 일은 어쩌면 나에게 남겨진 반생의 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나를 뒤따라올 것 같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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