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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철학으로 <모비딕> 읽기


플라톤, <파이돈>, 전헌상 옮김, 아카넷, 2020

 




플라톤 철학은 서구 정신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약 2400여 년 전에 태어난 한 철학자의 사상적 유산이 큰 공감을 얻고 종교와도 접목되며 살아남아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정초해 놓았다. 구체적으로 그는 대화 형식의 여러 철학서를 후세에 남겼는데, 그 가운데 후대의 수많은 사상가나 작가가 꾸준히 언급하여 제목도 익숙한 <파이돈>, <변명>, <국가>등 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나는 이 가운데 영혼의 문제를 다룬 <파이돈>에 먼저 주목해 보았다.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자신의 제자 및 벗과 함께 나눈 철학적 대화를 재구성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앞에 내려진 ‘죽을죄’는 그가 당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그리스의 신을 온전하게 믿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범박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에 내몰리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며 발버둥 치지 않을까. 놀랍게도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행보는 믿기 힘든 반전을 보여준다. 제자와 벗들이 감옥에 모여 뇌물을 써서라도 감옥에서 탈출할 것을 권유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당당히 죽음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이미지에 골몰한 나머지 ‘죽음을 열망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미치지 않았다. <파이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사실 삶에 대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철학자는 오히려 우리가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대화를 통해 일깨워준다.

 

이 논의에 접근하려면 우선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 곧 플라톤의 인간관을 먼저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완전하고 영원한 신과 달리 인간은 불완전한 필멸의 존재다. 물론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기도 했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신체로 구분되는 영역으로 구성됨을 이야기한다. 서양사상의 전통 가운데 중요한 주제인 심신이원론의 뿌리도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엿보인다. 플라톤의 주요 저작 중 <변명>, <크리톤>, <파이돈>, <소피스트>, <알키비아데스>을 읽어 가면서 주목할 수 있었던 점은 인간의 영혼과 신체의 구분에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체는 ‘가시적’이면서 끊임없이 변하여 결국 소멸하는 대상이다. 반면 영혼은 비가시적이며 영원히 존속하여 동일성을 유지하는 대상이다. 감각적인 것의 근원인 신체는 이성(logos)의 근원인 영혼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 철학에서 신체는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틀과 같다. ‘신체는 감옥’이라는 표현마저 보인다. 신체의 욕구에만 충실한 삶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 나아가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플라톤 철학은 존재를 구속하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한 철학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이 주제, 곧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은 서양사상에서 끊임없이 논의되어 온 큰 흐름을 유지하는 주제다. 이런 시각을 한 가지 방법으로 삼고 지혜를 사랑하는 일을 우리의 철학함과 연관지어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신체의 구속과 욕망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일이 지혜를 사랑하고 철학 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지향은 신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과정, 곧 철학 하는 일과 죽음의 상태를 열망하는 일 모두가 신체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과 구조상 유사한 까닭이다. 이제 <파이돈>에서 철학 하는 삶은 죽음을 열망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철학자로서 죽음을 열망하는 태도를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턱대고 죽음을 열망하는 것과 구분한다. 평범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이건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신체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시급하다는 함의를 지닌다.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일은 우리가 노예 상태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함이니까.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야말로 서양 사상사의 주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플라톤 철학으로 소설 읽기


플라톤의 <파이돈>을 통해 그의 사상 일부를 접할 때 생각난 소설이 있다. 허먼 멜빌의 낭만주의적이고도 비극적인 소설 <모비딕>이다. 소설 전체가 플라톤 철학의 구현이 아닐까 싶은 요소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이 소설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플라톤 철학과 소설 읽기가 낯설고도 동시에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쫓으면서 <모비딕>을 펼쳐보니 눈길을 끄는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참고래가 생전에 스토아 철학자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주의자인 향유고래가 말년에는 스피노자를 친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478면)

 

멜빌은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은 숙명론자의 입장이면서 이성을 중시하는 금욕주의자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 멜빌은 참고래로부터 이러한 숙명론자이면서 금욕주의자인 면모를 읽어냈던 것일까. 멜빌이 남겨놓은 ‘참고래가 스토아주의자’라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참고래 머리의 표정을 보라. 그 놀라운 아랫입술이 우연히 뱃전에 짓눌려 턱을 단단히 감싸버린 것을 보라. 이 머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강력한 실제적 결의를 말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모비딕>, 작가정신, 468면) 아마도 멜빌이 스토아주의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했을 법한 인물이 소설의 1장에 언급되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일명 소小 카토)일 것 같다. 카토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로, 공화정을 옹호하며 카이사르에 대항했다가 실패하자 칼 위로 몸을 던져 자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멜빌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 굳은 결심의 인간 전형으로 스토아주의 철학자였던 카토를 1장부터 언급한 것이다. 그는 참고래의 모습에서 굳게 결심한 듯한 스토아 철학자의 모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이와 달리 ‘플라톤주의자’인 향유고래는 숙명론자의 특징을 지니면서도 ‘물질’보다는 ‘관념’, ‘신체’보다는 ‘영혼’을 중시하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특징을 향유고래로부터 읽어낸 것이 아닐까. 멜빌이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한 이유의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향유고래의 넓은 이마에는 죽음에 대한 명상적 초월에서 유래하는 대초원 같은 평온함이 충만해 있는 듯하다.”(<모비딕>, 작가정신, 468면) 특히 향유고래는 죽을 때 태양을 향해 방향을 틀고 죽는다는 표현도 ‘숙명론적이면서 영적인 존재’로서의 향유고래를 강조한다.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더라도, 굳은 결심으로 죽음을 대하는 스토아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서도 초연했던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떠올렸을 법하다. 멜빌이 거대한 서사를 계획하고 준비할 때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작품 속에서도 드러낸 점이 흥미롭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장면을 철학책의 기본 구도로 활용한 <파이돈>을 직접 언급한 대목도 살펴보자.

 

“이 자리에서 낸터컷의 선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충고하겠다. 경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포경업에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를 채용하는 것은 조심하기 바란다. 그런 젊은이는 시도 때도 없이 명상에 잠기기 일쑤고, 보디치의 <항해술>대신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다. 이런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고래를 죽일 수 있으려면 우선 고래를 보아야 한다.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플라톤 숭배자는 세계를 열 바퀴나 돌아도 고래기름을 한 통도 보태주지 못할 것이다.”(<모비딕>, 작가정신, 243면)

 

영혼을 신체보다 우월한 대상으로 보았던 플라톤 철학 중에서도 특히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파이돈>을 작품에서도 언급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직면하여 탈옥하라고 권유하는 제자 및 벗들의 말에 오히려 기꺼워하며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하며 ‘영혼 불멸’에 관한 논증을 제시한다. 이것이 <파이돈>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 철학, 그중에서도 <파이돈>을 인상 깊게 읽고 글을 써내려갔을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위의 인용 문장에서 ‘플라톤 숭배자인,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는 화자인 이슈메일 자신을 암시할 수 있지만, 정작‘움푹 들어간 눈’에 대한 평을 들은 바 있는 사람은 작가 허먼 멜빌이다.

 

멜빌이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과 교류를 시작한 시점은 <모비딕>의 원고를 쓰던 1850년 즈음이다. 이때 호손의 <주홍 글자>(1850)가 나왔으므로 멜빌은 집필 직전이나 과정에서 이 책을 접했을 것이다. 특히 15살 연하였던 멜빌이 호손의 칭찬을 받았던 일은 멜빌이 작가로서 자신감을 얻고, 호손을 자신의 멘토로 여겼을 것이다. 멜빌은 기회가 되면 호손을 여러 번 찾아간 듯하다. <사악한 책, 모비딕>을 쓴 너새니얼 필브릭은 호손의 부인 소피아가 집에 찾아온 멜빌의 눈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피아는 멜빌한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작은 눈’이라고 했다. “가끔 활기가 수그러들고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그 눈이 두드러지게 조용한 기색을 띨 때가 있어요. 내면을 향하는 듯한 흐릿한 표정인데 동시에 그 순간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매우 깊이 새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기이하고 게으른 시선인데 그 안에 무척 독특한 힘이 있어요. 사람을 꿰뚫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눈빛이에요.”

(너새니얼 필브릭, <사악한 책, 모비딕>, 홍한별 옮김, 교유서가 59면)

 

소피아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보면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 플라톤 숭배자’는 다름 아닌 허먼 멜빌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멜빌은 거대한 몸집에 지극히 ‘작은 눈’을 지닌 향유고래의 모습에서 자신과 동일시하며 ‘플라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읽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죽음에 대한 명상적 초월’의 덕목을 향유고래에게서 읽어 낸 대목은 <파이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짐작케 한다.

 

<모비딕>이 플라톤 철학의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다음과 같다. “꿀이 가득 든 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거기서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모비딕>, 작가정신, 478면) 이 부분은 포획한 향유고래의 머리 부분에서 경뇌유를 길어내던 인디언 작살잡이 태시테고가 향유고래의 머리에 빠진 직후, 고래의 머리가 바다로 떨어져 가라앉게 된 사건에 나온다. 작살잡이 퀴퀘그가 바다로 뛰어들어 태시테고를 구출한 후 이슈메일이 남기는 대목이다. 이때‘플라톤의 머리에 빠져 감미롭게 죽어간 사람’은 무엇보다 <파이돈>과 <변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신체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한 사람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대목을 살펴보자. 향유고래를 잡아 죽인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흑인 요리사 플리스 영감을 밤에 불러 고래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스터브는 자신이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뱃전에 묶어 놓은 고래를 뜯어 먹는 상어를 향해 얌전히 있으라는 연설을 시키는 장면이다. 요리사 영감이 마지못해 상어에게 전하는 연설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탐욕스러운 것을 그렇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타고난 거라서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그 못된 천성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단 말이다. 여러분은 상어지만, 근성을 억제하면 여러분도 천사가 될 수 있다. 천사라고 해서 모두 다 상어 근성을 잘 억제한 상어보다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비딕>, 작가정신, 419면)

 

플라톤 철학을 떠올릴 때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영혼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파이돈>에서도 ‘영혼의 불멸’을 언급하며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존재’를 지속한다고 말한다.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고 돌보며 영혼을 정화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에서도, 그가 인간의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인간 고유의 욕망, 탐욕을 감각적인 것, 신체적인 것으로 보고 이러한 천성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흑인 요리사 플리스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이 덕목은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4가지 덕목(지혜/용기/절제/정의)을 떠올리게 하는데, 플라톤은 신체를 지닌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일정하고, 이를 ‘절제’라는 덕목을 통해 훌륭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것이 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멜빌의 표현에 따르면, ‘천사는 절제의 덕을 훌륭하게 따른 결과’인 셈이다. 반대로 절제의 덕과 함께 천사도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다면 언제든 상어와 같은 악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전언이다. 소설 속의 이 장면은, 우리 인간 역시 스스로 영혼을 끊임없이 돌보지 않으면 언제든 천사에서 탐욕스러운 ‘상어’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을 서사에 녹여내었다.

 

포경선원들은 포경선에 오르기 전에 계약서에 배당과 함께 사인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남태평양에서 ‘문명 세계’로 나와 작살잡이가 된 퀴궤그 역시 3-4년 간의 바다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받게 될 배당과 ‘노동계약서’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모비딕>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작살잡이 퀴퀘그는 자신의 계약서에 사용하는 서명이 없기에 자신의 팔에 새겨진 문신의 문양을 서명으로 사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모비딕>의 판본마다 퀴퀘그의 서명(정확히는 서명이 아니므로 그의 표시)이 다르게 나오는데, 판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X', '╋', '∞' 의 세 가지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멜빌이 의도한 퀴퀘그의 서명이 '∞'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영어 원서의 묘사에 'a queer round figure'(기이한 둥근 모양/문양)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 표현이 있음에도 몇몇 번역서들은 곡선이 보이지 않는 ‘X'나 '╋'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부분의 번역을 생략한 번역서도 보인다. 반면 몇몇 판본은 ‘기이한 둥근 모양/문양’이라고 번역하고, '∞'를 퀴퀘그의 표시로 제시한다. 원서의 표현을 참고한다면, 유일하게 이상한 곡선이 들어간 표시로 '∞'이 사용됐을 것이란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플라톤주의자’를 자처하는 화자와 만났을 때,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보는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있던 피타고라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주의 원리를 수를 통해 탐구하는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수비학’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성격,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종교 지도자의 아우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피타고라스는 무한의 개념을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기도 하기에, 무한을 나타내는 기호 역시 '∞' 역시 이교도적인 요소로서 이교도인 작살잡이 퀴퀘그의 팔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있다. 이 무한대 개념은 <파이돈>의 주된 논증 주제인 ‘영혼 불멸’과 관계가 있다.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언젠가 물질 세계에 있는 신체와 만나 환생할 수 있다는 ‘영혼 회귀’의 기본 개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은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신성모독적이고 이교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모비딕>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분명히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젊은이는 바로 허먼 멜빌이었던 셈이다.

 

이제 거리를 두어 <모비딕> 전체를 조망해 보자. 소설의 시작은 돈이 궁핍해지고, 영혼이 을씨년스러워 우울감에 빠진 채 갈 곳 없이 배회하는 청년이 권총과 총알 대신 바다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이슈메일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한편 소설의 마지막은 ‘모비딕’의 공격을 받고 피쿼드호가 침몰한 후 혼자 살아남은 이슈메일의 독백으로 끝난다. 소설은 이슈메일이 바다로 향하는 대목으로 시작하여, 그가 바다로부터 구출되어 나오는 대목으로 끝난다. 이슈메일은 큰 사고를 겪었으니 이제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않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육지에서의 삶이 또다시 피폐해지고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이슈메일은 또다시 바다를 생각하고 바다로 나가게 될 운명은 아닐까. 이는 플라톤의 ‘영혼 불멸’과 ‘영원 회귀’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육지는 물질적 세속의 세계이며, 바다는 영혼이 신체를 벗어난 ‘죽음의 세계’ 혹은 ‘영혼을 돌보는/혹은 영혼 정화를 위한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을까 싶다. 이 ‘영혼 불멸’과 ‘영혼 회귀’의 개념 역시 이교도적인 성격,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피쿼드호의 흑인 소년 ‘핍’을 생각해 본다. 핍은 포경선에서 사람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때론 탬버린을 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고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망망대해에 빠진 후 정신을 놓게 된다. 문자 그대로 백치가 되어 버려 그의 영혼은 온전치 못하게 된다. 그의 신체는 껍데기로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바다라는 공간을, 영혼을 돌보며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본다면, 여기에는 분명 위험 요소도 있다.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 신체를 이탈한 영혼은 정화된 상태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핍은 이러한 사례를 보여준다.

 

피쿼드호가 ‘모비딕’의 일격을 받고 침몰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바다를 ‘거대한 수의’로 언급한다. 바다는 신체를 지닌 생명의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는 죽음의 공간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다는 철학자가 죽음을 열망하듯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형이상학적 공간일 수 있다. 피쿼드호의 침몰 직후 포경선의 목수가 퀴궤그를 위해 제작한 관을 봉해 마련한 부표가 물 위로 떠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슈메일은 죽음을 상징하는 관-부표를 타고 다시 삶을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러니 바다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이면서, 신체와 영혼이 합일하거나, 혹은 분리되기도 하는 제3의 무대인지도 모른다. 핍의 사례나 이슈메일이 소설의 시작에서 바다로 들어가고 다시 바다에서 육지로 나오는 일련의 과정은 소설의 기본 구도가 ‘플라톤적’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모비딕>은 방대한 소설이다. 소설 쓰기 작업에 사용되거나 언급된 참고도서 만큼이나 많은 요소가 작품에 기여했다. 여기에는 작품에 영향을 준 요소로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그의 문체, 사회적 악의 문제를 다루는 너새니얼 호손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또 향유고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나아가 소설 전체의 기본적인 구도까지, 그리고 영혼과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문제를 고려한다면, <모비딕>은 그 자체로 플라톤 철학의 소설적 구현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에 기대어 <모비딕>을 읽을 때, 우리는 ‘플라톤주의자’ 이슈메일의 영혼 뒤에 가려진 허먼 멜빌의 영혼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모두 그가 남긴 철학의 주석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2000여 년 전에 한 철학자가 남긴 사유의 흔적을 이토록 후대인들 역시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인류가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플라톤 철학은 바로 이 문제를 직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사유 속에 머물게 될 듯하다.

 

멜빌이 포경선을 타게 될 선원들에게 설교하던 매플 목사의 입으로 필멸의 인간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영원히 산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모비딕>, 작가정신, 106면) 삶과 죽음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인류의 영원한 과제다.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이 바로 플라톤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책 한 권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앞서 우리의 영혼과 삶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남겨놓았다. 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된 화두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언젠가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우리가 나누게 될 마지막 이야기는 무엇이 될까. 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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