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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
  • 케네스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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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5
  • : 945





문명의 정체성 탐구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과정

- 《문명》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지음 

이연식 옮김 [소요서가] | (2024)

 




《누드의 미술사》,《그림을 본다는 것》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서구 문명을 조망하듯 정리한 《문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로써 케네스 클라크의 서양 미술사 3부작이 완성된 듯하다. 특히 이 책 《문명》의 특징은 TV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BBC와 협력하며 직접 대본을 쓰고 엮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듯 서양의 미술작품과 역사를 함께 설명해주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원전 300여년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시기에 걸쳐 있는 서양의 회화/건축/조각 작품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저자(출판사)는 이 책의 원제목을 《문명 Civilization》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는 ‘문명’의 범주는 매우 제한적이다. 서유럽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유럽 중에서도 ‘문명’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 ‘프랑스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책의 시작(아마도 첫 방송분)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파리의 퐁 데 자르라는 점이 상징적이다. 이 지역은 프랑스 지성의 산실인 프랑스학술원과 문화의 산실이자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 그리고 종교의 산실을 상징하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양 문화의 토대라고 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정수를 한 장소에서 잘 보여준다. 다만 50여 년 전에 제작된 방송치고는 그의 입장을 표명하는 행보는 상당히 대담하다. ‘편견어린 견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행보를 (아마도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관점을 선명하고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견해와 지식, 이해정도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옮긴 역자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저자는 ‘문화 예술의 중심을 서유럽(그 중에서도 프랑스)이라 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점은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새롭게 드러나게 된 주변국과 문화의 강력한 비판을 일으킬 소지가 충분하다. 새롭게 알게 된 점은, 이 책(혹은 다큐멘터리 방송)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저술이 바로 미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1972)라는 것이다. 대강 이 정도의 구도만 보아도 이 책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자리와 서술 방향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줄곧 붙들고 확인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곧바로 책의 핵심을 묻는 질문일 것이다. 다만 이 질문은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정의내리기 어렵다. 책 전반에 흩어져 있는 ‘문명’의 속성을 언급하는 개념들을 모아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직접적으로 얻기 전에, 저자는 ‘문명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밝히며 시작한다.


 

“문명의 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 공포입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침략에 대한 공포, 역병과 기근에 대한 공포.”(25)


TV다큐멘터리 대본으로 마련된 이 글은 1969년에 작성되었다. 저자가 연설하듯 이 말을 방송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며 말한 이 시기에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원자폭탄에 수소폭탄의 위력을 더한 위기의식을 체감했던 것이다. 특히 1962년 미국 본토의 앞바다에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암울한 전망밖에 남지 않았던 당시의 정국을 보여준다. 미·소 양국은 수소폭탄을 쌓아 놓고 힘겨루기를 했던 시기다.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인들이 목격했던 인간성의 실추와 인류 공멸의 위기의식이 최고로 치솟았을 시기였다. 무엇보다 《문명》이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저자의 이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인간성에 대해 실망스러운 사태를, 세계 문명의 중요한 역할을 자처하는 유럽에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인류 각성의 필요를 느끼게 해주었을 법하다.


이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다시 접근을 시도한다. “문명이란 활력과 의지와 창조력 이상의 무엇입니다. (...)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영속에 대한 감각입니다.”(40) 이 표현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큰 정체성 요소 하나가 등장한다. 문명이 ‘영속에 대한 감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건함’과 ‘견고함’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혹은 ‘변화 없는 상태의 지속’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의미일까? 그런데 조금 다른 문명의 요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과정이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것”(158)이라는 점이다. 이건 ‘영속’이 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다만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아 좀 더 단서를 찾아보면, ‘문명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북유럽적 특징으로, 분별과 예의범절에 대한 조야하며 동물적인 적의’(218)를 꼽고 있다. 이 ‘동물적인 적의’를 ‘북유럽적인 특징’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는 여러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분명한 건,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특징적 요소에 ‘영속’, ‘질서’, ‘분별’, ‘예의범절’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명이란, 인류 집단이 어떤 체계 속에서 분별과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의 영속이라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저자가 다른 존재 혹은 그들이 남긴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혐오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문명화된 삶의 특질’로서 제시하는 요건은, “모든 종류의 인간과 그들이 놓인 온갖 상황에 연민을 품으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관대하다는 것”(274)이다. 곧 타 존재에 대한 ‘연민’과 ‘관대함’으로 정리 해볼 수 있겠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정체성’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영속에 기여하는 것, 혹은 이러한 지향에 기여하는 제반 활동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 이를 조금 달리 표현하면, 문명의 요건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신뢰’에 기반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속성이든, 질서나 안정감이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 텍스트는 1969년에 정리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이 20세기까지 인간이 반복적으로 겪은 끔찍한 살상 기록과 파괴, 폐허를 직시하고 목격한 저자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대량 파괴와 인류 공멸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상황 속에서 실추된 인간 정신을 다시 긍정할 필요가 있었을 테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의 회복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또 새로운 세대로부터 새 희망의 불씨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 케네스 클라크가 생각하는 문명의 윤곽을 정리해보니, 그의 견해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하게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문명’ 개념은 ‘남성적’, ‘굳건하고 조화로운’, ‘안정된 질서’, ‘합리적 이성’과 같은 어휘를 곧바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이성의 지속적인 발달과 함양을 믿고 있는 듯하다.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서유럽이 이러한 이상을 이어받았습니다.”(24)라고 말하며, 이를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범한 창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저자의 주장은 꽤나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논의의 범주를 서유럽의 역사에 한정하고 있음에도, ‘전체 인류의 역사’를 무턱대고 언급하는 방식에는 논리의 비약도 보인다.

이 책이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사례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역자 역시 이 책이 비판의 여지가 여러 군데 보이긴 해도, “비판적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그 비판이 겨냥하는 쪽을 알아야 한다.”(473)고 언급한다. 견해가 다양하고 대립하는 공동체에서 건설적인 논의와 대화가 지속되려면, 우선 대화의 출발선에 함께 서야 한다. 논의의 전제에 대해, 기본 개념의 범주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기반이 마련되어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사고의 경직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같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상상 부분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면서도 종종 내 의견과 틀어지는 지점이 발생하곤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다른 목소리라고 해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만 있다면 언제나 좋은 토론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저자의 이 자신감 속에 바로 ‘문명’의 토대가 되어온 인간의 기본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덮으니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여러 점들 사이를 지그재그 형태의 선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내게는 이 표지 그림이, 인류사적으로 여러 변곡점 사이를 왕복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부단한 행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에 나타나는 ‘반복’의 요소(‘역사는 되풀이 된다’)에 정확히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없기에 발생하는 ‘차이’가 더해져 발생하는, 일종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이 그림은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리듬을 상징하는 그림처럼 읽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 케네스 클라크는 이 책에서 혼란과 위기에 처한 인간의 윤리성과 신뢰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여기에 또다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질서를 다시금 부여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soyoseoga

#소요서가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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