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창비] (2020)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
솔닛의 글을 읽다보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대자연의 풍광을 담은 사진들에서 서구 백인들의 정치적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백인)이 원래 살던 터전으로부터 밀어내어 요세미티의 숲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원주민들에 대한 무시와 폄하를, 솔닛은 서부의 광대한 자연 풍경 사진으로부터 읽어 낸다. 자연에서 원시성, 새로움을 찾으려는 백인들의 열망은 원주민들과 관련한 이슈들과 오버랩되는 장(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부의 풍경사진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백인들은 ‘애초에 이 땅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우리들이 찾아내 차지한 땅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이런 시선이 요세미티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자연 풍광을 담아내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이지만 강력한 프리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요세미티를 비롯한 지역이 ‘국립공원’이 된 배경에는 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한 무시와 역사 지우기 행적을 덮어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 리베카 솔닛이 캘리포니아 자연의 새로움과 원시성을, '타락하고 쇠퇴해가는 유럽의 분위기'와 비교하며, 미국인들이 느끼는 '문화적 열등감'이 아니라 우월한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지표로 활용했다고 지적하는 지점도 인상 깊다. 이런 주제를, 한 사진가의 삶을 다루는 글에서 자연스럽고도 치밀하게 녹여 낸 솔닛의 탁월한 글쓰기에 또한번 반하게 된다.
머이브리지는 사진의 역사에서 단순히 연속촬영과 영화 매체를 견인한 기술적 선구자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국내에서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적인 시선만 크게 부각되어버린 듯한데, 역사학자이자 사진연구가, 사진 비평가로서의 면모와 놀라운 통찰, 예리한 안목을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그림자의 강》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철도 건설을 중심으로 서구 백인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과 동물 학살에 대한 주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과 부조리한 관계, 식민주의/제국주의의 문제 등이 하나의 큰 강처럼 이어지고 흘러가는 듯하다. 소수자/타자에 대한 서구 사회의 지배와 폭력적 시선이 한 인간과 사진의 역사와 더불어 층층이 교차하고 있는 글로 읽었다.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성을 상징했다."(130)
"사진 속 남자들은 마치 막 풍경을 발견한 것처럼 사진 전면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만들어갈 것처럼 역동적으로 그 풍경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야생 속으로 질주하던 지치지 않는 진보는 머이브리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그의 인물들은 그 풍경을 처음 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호하고,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과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모호함에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했던 이민자 머이브리지와 미국인 동료 사진가들 사이의 간극이 숨어 있었다."(136)
"그들(미국인들)은 인류사에서만큼은 캘리포니아가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왔던 이들, 즉 원주민이나 스페인 정착민의 역사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141)
"그런 새로움에 대한 환상의 초기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의 존재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통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야 할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땅이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랐던 쪽은 오히려 원주민들이었고, 도끼를 휘둘렀던 아담들은 개발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말 그대로 삭제되었다."(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