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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ostred
  •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
  •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 12,600원 (10%700)
  • 2016-08-30
  • : 198

노르웨이 저자가 쓴 이 책,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은 섬세하고 꼼꼼하게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이다.

완성도 높은 그림은 그림의 일부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충분히 섬세하고 아름답듯이, 

이 책도 한 장면, 장면, 한 문장, 문장이 아름답다.

하지만 그 진가는 역시 전체를 조망했을 때 제일 잘 드러난다.

 

“현재 북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자 모험가, 역사학자, 사진작가, 저널리스트”라고 책에 소개돼 있는 저자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와, 본래 예술가이면서 “바다가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의 친구 후고는 어느날 고무보트를 타고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에서 그린란드 상어를 잡기로 의기투합한다. 

이름하여 그린란드상어 잡기 프로젝트.

 

그린란드상어?

공교롭게도 지난 8월12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그린란드 상어가 척추 동물 가운데 최장수 동물로, 최소 400년 이상 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우리나라 언론들은 (그린란드상어가) “임진왜란 때부터 살았어요”, “신사임당과 동갑이에요”와 같이 재치 있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2016년 8월12일 <사이언스>에 이 흥미로운 논문이 실리기 전에 책을 쓴 저자는 안타깝게도

“최대 200년까지 살 수 있다”는 당시의 유력한 이론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가 잡으려는 그린란드 상어가 나폴레옹 전투 때 태어났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럼 왜, 이 두 사람은 살아 있는 유물과 다름없는 그린란드상어를, 

그러니까, “수억 년의 진화를 거치고, 어쩌면 피에 맹독이 흐르고, 눈과 거대한 톱니 같은 이빨에 기생충들이 우글거리는 게걸스러운 괴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네 손으로 꼭 잡겠다고 벼르는 걸까.

 

저자의 파트너, 후고는 그린란드 상어가 서식하는 베스트피오르 해안에서 나고 자랐고, 

독일의 유명 예술 대학에서 잠시 유학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바닷가에서 살았다.

후고가 독일에서 배워온 것은 그림 외에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보적 견해”. 

정치적 진보가 아니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진보다.

저자가 “후고는 대체 몇 퍼센트까지 바다 포유동물일까” 궁금해할 정도로, 후고는 바다를 사랑한다.

아니, 그냥 바다 포유동물, 바다 생물이다.

또 후고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냉동 생선너겟을 먹지 않았고, 

대신 직접 마련한 신선한 야채수프, 수제 사슴 소시지를 먹는다.

겨울 대구를 직접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조시켜서, 그러니까 “햇빛에 너무 많이 노출되지 않게 하고, 무엇보다 비를 피하기 위해 생선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다시 내놓기를 반복”해서 먹는다.

후고와 저자가 1년째 그린란드 상어를 잡지 못하고 허탕만 치다가 배까지 고장이 나 수리를 맡겨 놓고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과 갈등 기류가 생겼을 때, 저자는 후고에게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왜 그렇게 그린란드상어를 잡으려는 거야?"

 

후고가 답한다. 

 

“적어도 30년 전부터 나는 그린란드상어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잡고 싶었어.”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야. 누군가에게 얘기하거나 읽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 며칠씩 그린란드상어가 미끼를 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오던 때를 묘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쓴다.

 

“지금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무의미한 것 중에서 우리의 상어 프로젝트를 능가할 만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저자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는 “현재 북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답게 글 솜씨가 신묘하다.

재치 있고 기발해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답게 역사와 신화, 해양지식까지 두루 꿰면서도 딱히 가르치려 들거나 장황하게 지식을 뽐내지 않는다.

그저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때그때 짧은 단상과 함께 적절한 신화나 일화, 바다 이야기를, 딱히 독자에게 건넨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듯 풀어낸다.

어찌보면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이 무의미하다.

당연하다.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을 소개하는 책인데, 이미 상어 프로젝트가 “모든 무의미한 것 중에서” 가장 무의미한 듯 보인다고 고백한 마당에, 그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이야기들이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왜 무의미한 이야기들을, 별 맥락도 없이, 들쭉날쭉한 조각보처럼 이어붙이는 것일까.

 

“후고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을 좋아한다. 한 이야기가 서서히 힘을 잃을 때 다음 이야기에 바통을 넘겨, 이야기가 계주처럼 계속 이어져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고 후고의 화법을 소개하지만,

저자의 서술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심해의 희귀 생물과 해양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향유고래와 범고래, 포경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비딕, 로빈슨 크루소,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구의 생성과 진화에 대해,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쇠사슬이 박힌 트롤망으로 바다 밑바닥을 훑어 "생물이 우글거"리는 산호초 숲을, 즉 복원되려면 수 천년이 걸릴 "치어들의 보금자리"를 순식간에 파괴하는 트롤어선이나, 산호초 해역 인근에서 석유 시추 작업 허가를 받은 정유회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매년 바닷새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백만 마리 이상씩 목숨을 잃고 바다포유동물 수십만 마리가 죽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19세기에 시작된 바다의 산성화로,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플랑크톤이 사라져가는 긴박한 위기, 

즉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멸종될 인간의 운명을 저자는 이렇게 날카롭게 묘사한다.


"플랑크톤이 죽으면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만다.

우리는 결국 배에 잡혀 올라와 가쁘게 헐떡이는 물고기들과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저자가 바다 생태계 오염의 심각성과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책의 후반부, 네다섯 페이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네 다섯 페이지는 결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토록 아름다운 피오르 해안을 묘사하고, '바다 포유동물' 후고 집안의 내력에 대해 소개하고, 지구의 역사를 들먹이고, 아직까지 우주의 신비만큼도 드러나지 않은 심해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니, 이 무의미한 '상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메시지가 강렬하다. 

저자는 노련하다. 

아무 것도 자기 입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이야기하게 만든다.

이 책은 모든 걸 다 떠나서 문학 작품으로서만도 퍽 매혹적이라는 얘기다. 


이야기의 조각보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상어 프로젝트를 애초에 제안한 것은 후고였고,

저널리스트로서 아프리카 콩고의 실상을 직접 경험하고 취재해 집필한 <콩고에서의 살인>을 출간한 바 있는 저자는 

바다를 사랑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트로서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은 후고고, 저자는 기록 전달자에 가깝다.

후고는 어릴 때 그의 아버지가 했던 방식대로, 즉 맨손으로 맞짱을 뜨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그린란드 상어를 잡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린란드상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북유럽 어디나 먹을 것이 부족하여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되었음에도 그린란드 상어 고기는 남아돌았"을 정도로, 살에 독이 있고 오줌 냄새가 나서 식용으로 쓸 수 없을 뿐더러 잡아봤자 별다른 가치가 없다. 

상어프로젝트 자체가 무의미해 빠진 짓거리인 셈이다. 

하지만 후고가 하는 일 중에 썩 의미 있는 일은 많지 않은 듯하다.

도축될 위기에 처한 어린 양이 불쌍해 집으로 데려왔다가, 또 그 양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친구 양을 한 마리 구해줬다가, 

양 커플이 통제가 안 될 정도로 투실투실하고 강하게 자라자 근처 무인도 섬에 풀어준 뒤 수시로 들러서 안부를 확인한다든가(나중에는 사정이 생겨 도축을 하지만),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던 생선 가공 공장, 오스요르브루켓을 인수해 몇 년에 걸쳐 손수 수리한다든가,

또 먹을거리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느리고 번거롭게 마련해 먹는다든가.

이쯤에서, 저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은, 후고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보적 견해”가 얼추 이해된다.

돈 안 되는 일(무의미)을,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전통적이고 느린)으로 한다. 왜? 

"“나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거야." 

"누군가에게 얘기하거나 읽히려고"도 아니고, 비장하게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저자와 후고는 끝내, 그린란드상어를 잡지 못한다.

거의 잡았다, 가 놓친다.

바로 눈 앞에서.

잡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했지만, 잡은 이후를 전혀 대비해 두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들의 무의미해 빠진 일은 그렇게 완성된다.

철저히 무의미하게.

목숨 걸고 무의미하게. 

다들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진실은 삶이란 원래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목숨 걸고 무의미하게"는 목숨 걸고 삶을 진솔하게 직면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무의미한 (돈 안 되는) 일을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려면 목숨 걸고 해야 하니까.

저자는 후고를 "바다 포유동물"로 간주한다. 

바다 포유동물은 순전히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만도 매 년 수십만 마리씩 죽어나간다. 

그러니 후고는 멸종 위기 동물이다. 

저자는 인류의 재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기후변화로 재난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몇백만 년 뒤에 바다 생물은 원기를 회복하여 생산적인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몇백만 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원기를 회복하여 생산적인 균형을 다시" 찾는 것은 후고들일 것이다. 

무의미한 삶을,

대량으로 싹쓸이하는 방식이 아니라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기 욕심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목적을 위해 꾸려나가는 이들.

물론 몇 백만 년의 시간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참, 이 저자의 글솜씨가 탁월하다고는 본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아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재치 있고 기발해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기는.

웃음 끝에 눈물이 배일 것 같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내가 읽은 노르웨이 저자들 글투가 다 좀 그랬다.

<나의 투쟁>의 칼 오베크나우스고르도,

<빨리 걸을수록 나는 더 작아진다>의 스콤스볼도.


그나저나, 출판사의 의뢰로 리뷰를 쓰기로 한 건데, 

이거 느무느무 성실하게 쓴 거 아닌가 모르겠다.

좋다. 무의미하게. 돈 안 되는 일. 비효율적으로.



2016.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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