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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n81님의 서재
  • hdw6461  2024-02-07 13:17  좋아요  l (0)  l  l 수정  l 삭제
  • 변명.

    나의 신앙여정 속에 유의미한 흔적을 남긴 목사님은 없었습니다. 처음 만난 전도사님은 얼굴과 이름이 익숙할 무렵 다른 교회로 옮기셨습니다. 두번째 만난 전도사님이랑 꽤 친해졌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무렵, 당시 담당하던 청년부 목사님이 면담을 요청하시더라고요. 해당 전도사님의 발언 속에 얼마나 거짓말이 많은지 사례를 하나하나 언급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도사님이랑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좋겠어.” 이후 세 분의 청년부 목사님과도 썩 친해지질 않았습니다. 이후로 저는 교회를 옮겨다녔습니다. 4-5군데 정도의 교회를 옮겼지만 단 한 번도 유의미한 흔적을 남긴 목사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다들 실력미달이었습니다. 다들 신앙이 좋은 교회 관리자에 불과할 뿐, 목사로 저의 삶을 맡길만한 사람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네, 저의 신앙여정 속에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긴 목사님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첫 교회생활부터 내게 인상을 남겼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신도였습니다. 선생님이고, 집사님이고, 권사님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적 영웅은, 교회 누나였고, 교회 동기들이었고, 선교단체 선배들이었습니다. 저는 애초부터 목사 없이 교회생활을, 신앙생활을 영유해왔습니다. 물론 20대 중후반에는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분노가 가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목회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의 무수한 질문들과 고민을 해결하지 못해 아등바등거리며 내뱉었던 비명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애초부터 ‘목회자’에게 ‘애정’을 쏟아부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목회자’에게 ‘증오’를 퍼부었던 적도 없습니다. 그저 내 신앙생활에서 목회자는, 교회에 고용된 관리자요, NPC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좋은 목사’의 롤모델이 없었기에, 한때는 ‘목사’가 하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교회에 고용된 밥버러지 관리자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는 그런 저만의 고유경험을 통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을 꾹꾹 눌러담은 작품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책 기획단계부터, 이 책이 염두에 둔 ‘다툼’은 결코 심각한 교회의 분쟁이 아니라고 말해왔습니다. 쉽게 말해 담임목사의 성적 비리, 횡령, 거짓말 등등으로 생겨난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담임목사와 무관하게, 교회가 건축을 하면서, 혹은 교회가 식당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면서, (목사와는 별개로)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건’을 다루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해당 다툼으로 말미암아 목사에게 분노하고, 목사에게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목사가 잘 교육했더라면, 목사가 리더십을 탁월하게 발휘했더라면, 목사가 교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놓았더라면, 이런 사건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애초에 교회는 목사 없이도 돌아갔고, 우리는 목사 없이 서로 우정과 사랑을 주고 받지 않았냐고. 그러니 목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여정을 지금이라도 다시 걸을 수 있지 않겠냐고. 목사 없이도 여전히 잘할 수 있지 않겠냐고.

    실제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온통 다툼으로 시끌벅적할 무렵, 자신은 교회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게, 사람들을 돌보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 즉 ‘할매들’이 있었습니다. 아무 걱정이 없이 자기 신앙만 옳다고 여긴 것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그들은 교회 내의 중요한 결정이, 실제 교인들 사이에 주고 받는 애정과 우정을 망가트릴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간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할매들’에게 교회를 배웠습니다. 목사가 없는 교회를 배웠습니다. 목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았던, 목사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우정과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았던, 그 과정 가운데 탄탄하게 ‘교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할매들의 교회론을 풀어서 쓴 내용이 바로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의 독자는 ‘교회 안에 있는 교인’입니다. 또한 본서가 염두에 둔 독자는 목사 문제가 아닌 교회 내의 어떤 특정 사건으로 말미암아 갈등에서 큰 상처를 받고, 교회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평범한 신앙인, 즉 아줌마와 할머니들입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목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탁월한 결정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오히려 교인들끼리 주고 받는 평범한 사랑과 우정, 신뢰 속에 사실상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2011년 초에 알게 되었던 두 명의 후배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회 목사를,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선교단체 선배들을 ‘우상’으로 떠받들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친구들이었습니다. 둘은 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5-6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끝끝내 교회와 신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간간히 만나면 신앙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만, (적어도 현재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말도 되지 않던 목사의 말을 추앙했던, 혹은 말도 되지 않던 선배 혹은 선교단체 간사의 요구에 순응하려 애썼던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가끔씩 분노를 터트립니다. 2019년 초에는 한 우울증에 걸린 자매의 탈교회를 (청년부 목사로서) 도와준 적도 있습니다. 그 자매의 경우에는 자신의 우울증과 신앙적 훈계들이 결부되어 신앙언어 자체가 가스라이팅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년 이상 그 자매를 지켜본 이후에,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떠나야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그렇게 세 명의 탈교회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만큼은, 적어도 그 시점에서만큼은 그들의 탈교회를 돕는 것이 (역설적으로) 구원이라 여겼습니다.

    반면 그런 탈교회를 도와준 저는 어쩌다보니 교회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 없는 교회가 가능하다며, 다툼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다투는 속에서 겪는 의문에 대해 여러 성경의 이야기로 답해왔습니다. 저는 왜 여전히 교회 안에 머물러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어쩌다가 교회 내의 다툼으로 지쳐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는, 무척 모순적인 ‘저‘라는 한계, 더 나아가는 그런 교회 안에서, 다툼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으키는 ‘설교자‘의 한계 속에서 만들어진 내용입니다. 저는 목사의 사적 비리로 말미암아 교회에 환멸을 느낀 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습니다. 또한 오로지 목사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가스라이팅된 성도들과 함께 교회생활을 한 이에게는 교회에 대해서 해줄 말이 없습니다. (그곳은 교회가 아니었을테니까요.) 따라서 ‘목사‘와 무관하게 교인들과 애정과 우정, 신뢰를 나눠보지 못한 이들에게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도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요?)

    애초부터 저의 책은 보수적인 취지에서 기획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평범한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에게 감동을 주고, 통찰을 주었던 설교문을 짜깁기했거든요. 더 나아가 ‘목사’ 없이도 ‘교회’를 잘 일구고 있었던 그들의 경험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책이 도움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제가 교회로 돌아왔다고 해서 다른 이들 또한 결국 교회에 돌아와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것, 즉 ‘탈교회‘ 또한 때로는 삶에서 강력한 구원일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저는 교회에 운명적으로 엮여있을 뿐이기에, 교회를 향해, 교회 내에 아줌마와 할머니들을 향해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교회‘안에 있는 목사라는 한계 속에서 말입니다.

    네, 지금까지 변명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나은 내용을, 좀 더 나은 글로 쓰도록 더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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