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대담 중 김연수의 말)
‘무아’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타인 혹은 셰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결정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부모에게 나는 아들이나 딸이고 아들과 딸에게 나는 부모입니다. 회사에 가면 과장이지만 동창회게 나가면 오래전의 왕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은 그때그때 관계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존재인데 그걸 망각하고 커피점에서 아버지처럼 굴거나 옛 스승을 만난 자리에서 사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린다면 낭패를 보게 되죠.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는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어떤 인간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차별 받는 사람을 볼 때 부당함을 느낀다면 나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행동은 그 다음 가능해지죠.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는 또한 차별받는 사람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정신적 운동, 상상을 통해서입니다. 낯선 이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수 있는 능력은 모두 타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상상을 통해 가능합니다.
윤리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을 생각합니다만 이건 실험실처럼 모든 조건을 컨트롤할 수 있는 진공의 상태에서나 가능합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의 욕망이 뒤엉키면서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을 단번에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고 옳음과 진실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윤리적 딜레마는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 사이의 번민이 아니라 나의 옳음 나의 진실 그 자체에 대한 번민에 가깝다고 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미래가 다가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들의 실패)
미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의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 물어 본 후 이를 종합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건 미래를 만드는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것이지 미래 그 내용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인간은 조금씩 무지하다.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뜻에서도, 과거에서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각각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도) 덕분에 그 의견의 총합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괴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미래는 대다수가 원하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인만물위추구)
하늘과 땅이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세상은 나의 후회와 희망과 아랑곳없이 자기 뜻대로 변해간다
초견연주에서 중요한 것은 연주의 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고 느낀뒤에도 계속 연주할 수 있는 힘이지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연주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고통에 관한한 우리는 모두 짚으로 만든 개의 처지입니다. 그 개들은 각자의 무지로 쌓아올린 벽에 갇혀 지내고 있지요.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우리의 목소리는 그 벽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과 땅을 원망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이 먼저 그 벽을 그 다음에는 상대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이겠지요
(세상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아무리 원망하고 발버둥을 쳐도 그 흐름을 개인이 어찌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상대를 알지못함을 먼저 인정하는 것
내 뜻대로 될 리 없다라는 마음을 먼저 갖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을 마주할 수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옳다고 믿는 일들이 늘 승리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 세상앞에 욕하고 될대로 되라 라고 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초연을 연주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냥 서툴고 실수가 많아 쓸모없다 싶어도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그래야 실패라도 남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시 연주를 할 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큰 흐름을 바꿀 수 없어도 그 흐름속에서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알지만 받아들이는 것 그 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인지 운명인지
지금 이순간 나의 선택은 지난 시간의 여러 가지 경험과 나의 생각과 내 감정이 모여서 만들어낸 것 그리고 어쩌면 미래에 결정된 어떤 힘이 있을지도
거스를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조금씩 걷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나라의 혼란을 앞두고 도망치지 않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겠다는 동하는
화자에게 그 이야기와 함께 과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팠던 엄마 아빠와의 서울행 거기서 만난 친척 어른들과 정혜인
편지에 써준 멀버린의 이야기와 강한 염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혜인의 이야기
결론을 알면서도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마법사와
간절히 빌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한 어린 날의 소원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조금씩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 의지는 어디서 왔을까
누군가 나도 모르게 이끌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순한 나의 의지일까
무엇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조금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믿음이다.
(결정적 순간)
전시회를 돌 듯이 각 코너의 주제들을 만난다.
그 각각의 소제목은 결국 큰 흐름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감정에만 몰두하지 않은 다양한 상황들을 보면서 결국 판단은 독자가 하는 것이다.
지금은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잘못을 알아차린 순간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하나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쉬워보이지만 그것이 몰고올 파장도 생각한다.
그 파장은 내가 몰락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깨는 일이다.
다시 돌아가서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는 살아갈 수 없다는 알아차림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없는 일로 할 수 있고 모른 척 할 수 있지만
모른 척은 그냥 내가 눈을 감는 일 이상이다.
내가 어떤 가해나 폭력에 눈을 감는다면 그 일에 동조하는 것이고 그래도 된다는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글로서 선명한 이 문장이 내 앞에서 선택을 요구할 때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선택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말들이 고스란히 나에게 쏟아지고 내가 감당해야한다면?
윤리적 딜레마라는 선명한 주제가 보인다.
김연수의 글은 많이 생각을 하면서 개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를 관조한다면
히라노 게이치로는 계속 너라면 어떻게 할까? 이 선택을 너는 지지할거냐고 물어보고 있다.
내 삶을 돌아보고 그리고 질문을 마주하는 것
읽기에서 느낄 수 있는 쪼는 느낌 제대로다.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라면 영화 <good sister>가 있다.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
다정한 오빠가 있다. 동생을 위해 침대 한쪽을 내어주고 커피를 내려주고 다리가 아픈 동생을 업어줄 수 있는 사람. 연인에게도 다정한 사람
그냥 내가 아는 오빠가 오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오빠가 성폭력피의자가 되어 있고 나는 참고인이 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고 무조건 믿는 가족과 성폭력범은 너무 멀어 동생 로즈는 고민한다.
오빠가 그럴리 없다는 믿음이 있다. 무한 믿음과 지지가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야 하고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는 의무감
그 사이에서 로즈는 흔들린다.
영화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로즈를 따라갈 뿐이다.
가족이란 한 순간의 의심에도 흔들리고 균열될 수 있다.
의심은 한 순간이지만 관계는 지속된다. 내 가족이 나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남아있고 관계를 꺼끌하게 만든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다면 내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른 척하거나 덮어도 되는 걸까
만약 정말 오빠가 성폭력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가족의 믿음과 안전을 선택해야할지 어떤 진실을 선택해야할지 혼란스럽다.
어떤 선택도 후회나 갈등이 남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가끔 가족이 그런 말을 한다.
어떻게 니가 그럴 수 있어?
가족인데 내 편을 들어야지 어떻게 상대편을 들고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무조건 내 편이어야지
그 무조건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마음
나는 다른 의견이 있는데 그럼 내 의견은 어떻게 되는 건데 라는 마음
가족안에서 다른 의견과 다른 생각들 모나고 뾰족한 모서리들은 갈리고 깍여야 하는 부분이다.
둥글게 둥글게 서로 괜찮다고 하는 것
사실 그 안에서 나도 안전함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낀다. 그걸 깨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둥글고 안전한 소속감이 어떤 진실을 덮어버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진실을 밝히겠다고 가족에게 상처를 줘도 되나
사건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오빠의 예상대로 무혐의로 끝날 수도 있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건 본인 진술 이외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증언을 한 이후
가족사이의 불편함까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질문을 던지고 끝난다.
로즈는 경찰에 전화를 했지만 어떻게 했을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로즈가 오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했을지 우리는 모른다.
이제 우리가 생각하고 고민해야할 차례다.
<미루> 도 비슷한 주제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친족 성추행 경험을 가진 아영이 있다.
지금은 잘 자란 평범한 대학생이고 생활을 잘 하고 있다.
어느날 집에 갔을 때 친척오빠의 청첩장을 보면서 지난 일을 떠올린다.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 친척이니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는 엄마에게 아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지난 일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이고 이제는 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잊었던 일이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한 순간 이건 끝난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아영은 엄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나는 안가
그리고 혼란 갈등 고민.. 그 끝에 길을 찾는다.
중국어 수업의 시험 <말하지 못한 비밀> 이라는 작문에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어쩌면 낯선 언어 그래서 에둘러 말하지 못하고 사실 그대로 어떤 수사없이 서술해야 하는 언어로 드러낸다.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일거라는 교수의 말이 따뜻하게 들리는 건
내내 고민하고 생각했던 아영을 우리가 계속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영은 개운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엄마는 엄마답게 가해자를 만났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편안한 표정으로 결혼식에 가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고민하는 내내 아영은 엄마를 아프게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나 혼자 너무 힘들다는 생각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가족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와 이 상처를 처리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 마음은 양쪽에서 팽팽한 것이 아니라 한 방향에 있었다.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 그것에서 치료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가해자 처벌과 사과가 중요한 건 아닐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더 이상 그 문제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마음이
개운함을 가져다 주나 보다.
우리가 왜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왜 떠날 수 없느지를 담담히 보여주는 <부바>
위험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는 <파도처럼 지나가>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름을 보여주는 <우리가 죽지 않은 한>
오랜 가정 폭력을 파헤쳐보고 사과받고 인정받기 보다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질긴 악연을 내가 끊어내겠다고 결심하는 < welcom home fleckles>
주근깨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손녀와 그 주근깨가 못생겨보인다고 말하는 외할머니의 유쾌한 대화가 좋았는데
그래도 내때 보다는 낫다는 말이 먹먹하기도 했다.
폭력의 뿌리를 찾아보고 그래도 내가 가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변하겠다는 그 마음이 참 예쁘다.
<아빠들>은 좋은 아빠란 좋은 가족이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것
가족을 지키는 일이 누군가와의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 것 그래서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가장 큰 힘은 서로 도와달라고 말하고 기꺼이 도와주는 일임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아빠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아빠란 내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그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
다른 구성원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