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 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을 수완과 시간과 허신과 공감능력을 요한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건설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넉넉한 인심에서 비롯하는 행위다. 이러한 작업은 여전히 십중팔구 여자의 일로 치부되며 그 결과 이 막대한 과제를 얕잡는 온갖 단어가 난무한다.
아내와 어머니를 배태한 것이 사회라면 이이는 만인의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맡는다. 오랜 가부장제가 이성애 핵가족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이야기를 구축하는 작업도 이이 손으로 이루어졌다. 때에 따라 적절한 꾸밈새를 보태가며 말이다. 그리 손수 짓고꾸린 가정집에서 정작 스스로는 겉도는 느낌과 대면하는 순간 사회와 그 여성 불평분자라는 한층 큰 차원의 이야기가 촉발된다. 그간 희망과 자부심과 행복감과는 다른 여러 모순되는 감정과 분노 가운데 본인이 연기해온 사회적 이야기에 아주 무릎 꿇지 않은 한 그는 이야기 자체를 바꿔놓을 것이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분투한 사람치고 그에 수반하는 비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도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도 없이 오히려 그 중간 어디께 있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경계에서 서성이며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사실 난 침착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여성성의 구태의연한 정의에 따르면 침착함은 여성성이라는 문화적 인성 중에서도 주인공 격에 해당하는 특성이다. 그녀는 침착하고 그녀는 인내한다. 그래 견디고 고통받는데 소질이 있다 못해 실은 인내와 고통이 그녀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중략) 그럼에도 남자들이 쓰고 여자들이 연기해온 이 여성성이 21세기 초입을 여전히 기웃거리는 기진한 유령이라는 점만은 명백하다. 내 배역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중단하는데는 어떤 비용이 따르려나?
내가 아는 여자중에 여성성이라는 유령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유력이 뭔데> 여성성이라는 유령은 허상이자 망상이자 사회적 환상이다. 연기하기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며 그 역할(희생, 감내, 고통의 와중에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기)을 연기하다 끝내 이성을 잃고 만 여자도 수두룩하다. 그런 이야기라면 결단코 다시 듣고 싶지 않다.
다른 재능을 가진 새로운 주인공들을 찾을 때였다.
나는 혼자였고 자유였다. 관리되는 것도 거의 없고 수도나 전기같은 기본 시절마저 수시로 끊기는 집에 따라붙는 막대한 관리비를 지불할 자유가 내게 있었다.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다해 가는 컴퓨터에 글을 쓸 자유가 내게 있었다.
엄마가 된 여성들이 배우는 치명적인 인내심이 그들 스스로를 해치는 길임을 보부아르가 앞서 바르게 짚어내기도 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겐 이런 인내심이 없었다.
우리의 욕망을 주장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차라리 그런 욕망들을 조롱하는 게 더 마음 편하기 마련이니까
메두사가 내 내면에 깃든 게 반길 일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메두사는 막강한 힘을 지닌 여자이자 심기가 거슬린 여자였다. 남성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는 대신 정면으로 되쏘아 보며 맞서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두사는 신화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고 결국 여자가 잔혹하게 참수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자의 머리 (곧 마음, 주관. 주체성)와 몸의 분리로. 여자의 머리가 지닌 잠재력이 그만큼이나 위협적이란 듯이 말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위협적인 여성 권력을 끝장내고 남성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메두사를 참수한 것이리라 추정한 바 있다.
현대 가정을 둘러싼 변덕스런 정치가 한층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 터였다. 내가 아는 현대적이고 외관상 힘이 있어 보이는 여자 중의 다수가 다른 이들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도 보금자리에서 느껴야 마땅할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집보다도 사무실이나 다른 형태의 작업 공간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후자에선 그나마 누군가의 와이프 이상의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었다.
와이프 또한 가면을 쓰고 그 갖가지 변형된 모습에 맞게 얼굴의 양태가 달라진다. 집안의 주소득자인 여성 중엔 그들이 성취한 성공을 빌미로 남자 식솔에게 간사한 제재를 받는 이도 있었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알려주었듯이 힘과 성공을 남자 몫으로 간주하는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를 능가해서는 안된다. 남자가 여자의 재능에 경제적으로 의지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그리고 여자들에게 관해 역사적으로 행사해 온 길고 긴 지배의 특권을 수월히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진다. 동시에 여자는 자기의 힘을 숨겨야만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치명적인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
가부장제의 가면이 기형적이고 도착적이라는 걸 남자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에게 가면은 상처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가면에 장식이 많이 붙을수록 그는 여자와 아이와 다른 남자를 위압하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면은 다른 남자들의 눈에 낙오자로 비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남자가 성공적인 사람으로 간주되는 이유가 여자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기때문이라면 사회는 이런 측면에서 실패하는 것을 위업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여성을 완전히 억누르는 데 실패한 오늘날의 중년 남자가 자기 권한을 빼앗겼다고 여기면서 느끼는 고통 이는 세심함을 요하는 문제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 그 불편함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힘이라면 보여지는 존재와 보는 존재가 구분되는 것 역시 힘의 문제다. 보여지는 존재가 보는 순간.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불편하고 역겹고 불쾌하다.
누구나 나를 볼 수도 있고 보여질 수도 있음을 모른다.
보는 사람은 늘 보는 행위만 할 뿐 보여진다는 생각이 없나?
부모는 자식을 지켜본다. 돌보기 위해 안전을 위해 그러나 자식이 부모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순간들을 예의없고 버릇없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아내를 바라보고 사랑스러워하고 애정을 주는 존재인데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고 사랑스러워하고 뭔가를 베푼다고 느끼는 순간 불편함이 든다.
직장에서도 상사는 바라보는 자리에 있고 직원은 보여지는 자리에 있다.
일을 하는지 다른 짓을 하는지 모든 내 행동들이 시선속에 있다
학교 역시 교사들은 바라보고 학생들을 보여진다.
cctv를 달아도 그 내용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내 집주변의 모니터도 공권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찍히는 것은 뜻대로지만 그 화면을 보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메두사의 눈들
피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그래도 마주보는 그 시선이 불편한 이가 꼭 있었을 것이다.
굳이 목을 치고 눈을 파내야 하는 이유가)
(쓰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안다는 것은 오래 보고 오래 듣고 오랫동안 내 속에 덩어리 진 것들을 매만지는 일이다.
보고 알게 된 것들을 쓰게 되고 쓰면서 정리하고 다시 더 잘 알게 된다. 선순환이다.
보지 못하면 쓰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보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이고 그 말을 복종에 길들이는 것
아는 것은 아프지만 힘이 맞다. 아픈 힘이다.
괴롭지만 그 괴로움에 힘이 있다.
안다는 것은 다시 모르는 시절로 되돌릴 수 없다.
머릿속에 들어온 것을 잊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을 택한다. 알지 말라 알려고 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보지 말라
쓰지 말라.)
(방랑하는 밤)
낡고 닳은 이야기에 따르면 주인공이자 영웅이요 꿈은 좇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기에게 딸린 여자와 아이들의 청승맞은 요구와 멀찍이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할 일을 하러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아버지는 자기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것이라는 게 통념이다. 어머니들이 우리를 위해 꾸려놓은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환영을 받거나 아예 낯선 이방인이 돼 버리고 만다. 이방인의 경우 그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 보다 결국 우리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아버지는 세계에 나아가
우리 어머니들은 이러한 생활 가운데 우리와 살아가고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모든 걸 어머니 탓으로 돌린다. 동시에 우리는 어머니의 인품과 삶의 목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신화들과 공모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우리 몫의 불안감마저 떠맡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불안으로 넘쳐나기에 어머니에게 우리의 감정을 털어놓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불가사의하게 우리가 느끼는 바를 어머니가 모조리 이해해주리라 기대한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헌신하고 우리를 시중하는 자아가 아닌 우리 너머에 있는 당신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자아에 가까워지기라고 하면 우리의 보호자이자 양육자여야 하는 어머니의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사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어머니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 싶으면 어머니가 우리를 질식시키고 전염되기 십상인 불안감으로 우리의 섬약한 용기를 감염시키려 든다고 여긴다.
아버지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우리는 그게 아버지가 응당 해야할 몫이라며 옹호한다. 어머니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어머니가 우리를 버렸다고 느낀다. 이리도 모순되고 사회의 가장 강력한 독기를 머금은 잉크로 쓴 메시지를 어머니가 용케 견뎌내는 것이 가히 기적이다. 그러니 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있나
여자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사회의 서사와 결별할 때, 그가 맹렬한 자기 혐오에 미칠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이 멎지 않는 회한에 빠지리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이런 것이 여자를 위핸 마련된,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가부장제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다. 눈물지을 순간이 넘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어머니가 되기 전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자식의 엄마가 된다는 일은 늘 보던 일이라 잘 아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자식을 돌보고 식사를 만들어주고 깨워주고 잔소리하고 희생하는 존재 그래서 그 엄마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고 무엇을 잊어가고 있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애써 다잡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량한 모성을 들먹이며 쉽게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고 가차없이 비판했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엄마도 아니지
말은 쉬웠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뭐든 쉬운 법이다.
엄마가 되고 모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다그치고 몰아붙여서 그래야 한다고 계속 설득하면서 그리고 얄량한 인간애와 전우애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결국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만들었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를 부실하고 아슬아슬한 발판위에
모성은 죄책감을 먹고 자라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커져갔다. 마음은 아니고 머리는 아닌데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걸 엄마가 되고 알았다. 그럴 수도 있구나
몸이나 머리가 참 나약하고 별로구나
몸으로 익혀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일들
아침에 눈을 뜨고 부엌으로 향하고 아이 기저귀를 갈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들이 가끔 정말 가끔만 빼고 그냥 몸으로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해야하니 하는 일들
그 사이사이 죄책감이 끼어 들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오래 고민해서 해결되는 건 없다. 그냥 몸이 익힌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행했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행복했다. 즐거웠고 보람있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족들을 사랑했다. 얼핏얼핏 저주하고 미워하고 모른 척 하기도 했다
감사한 마음을 받았지만 즐겁지 않다.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때도 있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이럴려고 태어나고 공부하고 어른이 된 건 아닌데
어쩌면 내가 너무 단순하고 모자라서 두 세가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고민을 오래 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아닌 척 하고 있을 뿐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괜찮은 척 좋은 척 하는 거야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살아온 날이 후회되진 않지만 다시 살아보라고 한다면 같은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면 굳이? 라고 반문하겠다.
도시락 싸들고 말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바뀌지도 않을거고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마음도 있고
뭐 모성이란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은 한 번 무너짐과 다르지 않다.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던 결혼이 끝나고 서류를 정리하고 짐을 나누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공간을 바꾸는 것
이제 내 이름이 바뀐다.
누구의 아내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
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 있고 나의 삶은 그 비용의 댓가로 주어졌다.
혼자 고장난 수도파이프를 고칠 자유, 무거운 전기자전거를 장만할 자유, 그 자전거를 뒷마당까지 옮겨야 하는 자유, 머리에 흙이 묻은 나뭇잎을 붙이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자유, 로드킬을 당한 닭을 다시 주워서 저녁 식사를 해야하는 자유, 누구도 돌보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자유
그 모든 시간은 내가 몸으로 해낸 살림비용을 치러낸 것들이다.
자유롭고 싶어
쉽게 내뱉는 말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무게들이 달려있을까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세상의 편견들과 가족단위로 부과되는 의무와 권리들을 바꾸어야 하고 나에게 닥친 일들을 내가 해결해야한다.
나를 돌보는 누군가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가고 노력해야한다.
그래도 할 만 한건 주변에 따뜻하고 오지랖이 넒은 사람들이 아직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로 수입을 만들 수 있다면 살아볼 수 있겠다.
작가는 이혼이후 동화같은 가정의 벽지를 벗겨내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잊힌 여자를 꺼집어 내어 다시 스스로 비용을 치를 자유를 주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가끔 나오는 딸들의 이야기들
그래도 작가는 일이 있고 그 일에서 간당간당하지만 수입이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내가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얼마나 될까
한 번은 나 자신을 혼자 두고 그 비용을 계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얼마의 비용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그 비용을 치르고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나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살고 있는 중인가?
이제 삶이 한 모퉁이를 지난 나이에 어쩌면 다시 도전하고 선택해야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올라오는 지금 살림비용이라는 단어는 우박처럼 차고 단단하게 쏟아진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법
어떤 드라마의 누군가의 대사처럼
묻어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유혹 혼자 하고 혼자 다 처먹을거라는 유혹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