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지
나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구속하고 폭력을 쓰고 나를 억압하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고립시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을거야
나라고 별 수 없을거야
그게 저 사람의 진심이 아닐거라고 믿고 싶을 거고
늘 저러는 사람이 아니라고 좋은 기억들을 헤집어 꺼내서 늘어놓으려고 할거야
누구에게도 자존심때문에, 믿어줄 것 같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너같은 여자가. 똑똑한 여자가, 친구도 많고 사회생활도 하는 여자가 뭐가 모자라서
그런 꼴을 당하고 참고 있냐는 말들 눈빛들 침묵들을 나도 견디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나도 다르지 않을거야
나는 가해자는 되지 못하겠지만 다시 한번 상처를 입히는 이차 가해자는 될 수 있겠지
왜 저러고 살까
저런 남자를 고르는 기준이 뭐였지? 눈이 저렇게 낮다고?
왜 도망가질 않아?
왜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지?
그러니까 늦은 밤 술에 취한 행동이나 난감한 옷차림은 아니었으면 좋았을걸
물론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보니까 뻔한 남자인데 왜 질질 끌려다녔을까
그럴 수 있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절대 저럴 리 없지
피해자가 되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야
결국에는 다시 돌고 돌아서 세상의 통념과 구조적인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
아직도 이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
여자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선이라는 것들이 여전히 불균형하고 이만하면 남녀 평등이 아니냐는 말이 무수리에서 이만큼 올라왔으면 된 거 아니야? 더 이상 뭘 바라는거지? 라는 적선하듯 그냥 하찮은 존재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가 이제 조금 아주 미묘하게 반대쪽으로 기울어졌을 뿐인데도
호들갑을 떨면서 이젠 남녀 평등이 아니고 여성상위라고 부르짖는 사람들
남성에 의한 여성의 폭력에 대한 어떤 제대로 된 통계도 없고
통계가 없으니 그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모르고 사는 것이 당연하고
피해자를 모으면 여느 참사 못지 않은 수가 있을텐데 모든 사건이 모든 피해가 개별화 되고 특수한 아주 나쁜 어떤 인간의 행동일 뿐이라는 생각들이 모여서
여전히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과 살인과 통제가 투명해지고
개별적인 문제가 된다.
통계가 모여서 실체가 드러나고
그에 맞는 대책이 세워지고 법이 생기고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가정의 회복이나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피해자 개개인의 회복이며
그 회복을 위해 강력한 처벌들이 필요하다
심신미약이어서 앞날이 창창해서 많이 반성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마음에 욱하는 심정이어서
상대가 잘못해서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술을 먹어서 뭘 몰라서
그런 단세포같은 이유가 절대 통하지 않은 것들
그리고 지원체계고 투명하게 모두가 알고 적용할 수 있기를
갈길이 멀다.
그러나 방향이 명확한데 왜 자꾸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그렇게 큰 일이 아니어서 라고 생각하는 머리들 때문에?
지구의 절반이 고통받는 폭력앞에서 우리는 계속 바른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겠다.
친밀한 관계의 폭력은 남의 일이 아니다.
당신이 피해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주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별 일 아니라서 할수록 더 심각하고 복합적인 일이다.
헤어지다 죽거나
대들다가 맞거나
관계를 거부해서 목을 졸리거나
대출을 받아주지 않아서 흉기를 드는 그런 상황이
엄벌에 처해지기를
아니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기를
그가 나와 다르지 않다고 당연히 생각하기를...
참 오랫동안 전혀 변하지 않은 폭력이 지치게도 하지만
그래도 계속 소리낼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