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하는 말들 (황석희)
화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화낼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먼저 화를 내야 상처받지 않는다는 착각, 먼저 공격해야 방어에 유리하다는 계산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도 모르는 새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다.
2. I’m not defined by you (나는 당신에게 정의되지 않는다. 네가 뭔데 날 정의해)
어떤 사람이 나를 고구마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고구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엔 날 정의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남들 말에 딱히 휘둘릴 일도 아니다.
3. 서른의 불안감을 어떻게 이겨 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사실 서른의 불안감을 이겨 낸 게 아니라 그저 떠안고 살았던 것 같다. 불안이 내 속을 아무리 좀먹어도 피가 철철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선천성 무통증 환자처럼,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안 아팠던 걸까.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아파서 아픈 줄도 몰랐는지도.
4. 어떤 논리가 있든 어떤 사정이 있든 내 마음에 안들면 틀렸다고 주장하는 태도
이런 상황이 연출되면 대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목소리 큰 사람과 싸우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5. 자식들은, 특히나 궁하게 자란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대로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나는 그 시절을 한번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당신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했을까
6.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보통 셋이 이야기할 때 둘이서 다른 한 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린 너무나 당연하게 아이 앞에서 이렇게 대화해 왔다. 아이가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번역을 한다는 건 소통이다.
당신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다.
서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어도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상대방의 언어가 나와 다를 때가 있다. 같은 모국어가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경우
그래서 상대방의 뜻이 오역되고 내 뜻이 오역되기도 한다.
타인은 늘 낯선 존재다
내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일뿐
타인은 어제 알던 사람도 오늘은 다른 사람이다.
내가 미루어 짐작했던 일들. 내가 배려한다고 믿으며 삼켰던 말들 묻지 않은 말들이 때로는 서로를 오역하는 일이 된다.
상대가 먹을 수도 있다고 믿고 먹지 않은 과일이 냉장고에서 썩어갈 때
상대는 내가 사놓은게 마음에 들지 않아 먹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원망을 삼킨다.
혼자 있고 싶구나 여겨서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올 때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나 하는 마음에 서운함으로 빈 마음을 채운다.
늘 고생해서 힘든 시간만 보냈을거야 라며 가엾은 마음을 품을 때
사실 고생이 많았지만 사이사이 행복하고 예쁜 기억들은 지워져 버린다.
상대를 단언하지 말라
그는 내가 아니다.
사람이란 납작한 존재가 아니다. 너무 다면적이어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미움을 받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나를 잘 아는 건 결국 상대에게 가까워지는 길이다.
번역을 한다는 건
다른 언어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
사람사이에도 번역이 필요하다.
사람사이에도 노력은 늘 필요하다.
나는 노력이라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을 한다는게 사랑이 아닌게 아니라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