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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기록합니다.
  • 납치된 서유럽
  • 밀란 쿤데라
  • 9,900원 (10%550)
  • 2022-10-11
  • : 595


팔라츠키에 따르면, 중앙 유럽은 서로 존중하면서 공동으로 뭉친 강력한 국가의 보호 아래 제각기 다양한 특성을 살릴 평등한 민족들의 중심이 되었어야 했다. 비록 제대로 실현된 적은 없지만 중앙 유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공유했던 이 꿈은, 그럼에도 여전히 강력했고 영향력이 있었다. 중앙 유럽은 유럽과 유럽의 다양한 풍요의 응축된 이미지, 매우 유럽적인 소(小)유럽, 즉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다양성이라는 규칙에 따라 잉태된 민족들의 축소화한 유럽이라는 모델이고자 했다. 그런 중앙 유럽의 코앞에서 최대 공간에 최소 다양성이라는 정반대의 규칙을 내세운 러시아에게 어떻게 중앙 유럽이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48쪽

<납치된 서유럽>의 저자 밀란 쿤데라는 본디 체코 태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2019년까지도 프랑스 작가였던 체코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4년 전 즘 읽은 기억이 있다. 작품 중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이라는 독일 속담이 등장한다. 본디 이 문장은 실수, 역경 등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가볍게 넘길 때 사용하는 어구다. (예 : 사소한 실수를 했을 때, 한 번 정도는 괜찮잖아?)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토마시는 이 문장을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비약해, 쾌락을 탐닉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당시 그런 토마시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납치된 서유럽>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 작품의 등장인물들에 스며든 사상적 배경과 허무주의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납치된 서유럽>은 1975년 자국에서 추방당한 밀란 쿤데라가 추방 이전인 1967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대회 연설문 [문학과 약소 민족들]과 1981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후, 1983년 프랑스의 지식인 저널 [데바]지에 기고한 시론 [납치된 서유럽]을 한데 묶은 작품이다. 때문에 <납치된 서유럽>에서는 유럽 강대국에 직접적인 압박을 받았던 나라의 자국민으로서, 자국(혹은 집권세력)으로부터 쫓겨나 망명된 이방인으로서 밀란 쿤데라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영화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문학과 약소 민족들]에서 등장하는 밀란쿤데라는 체코 문학의 가치와 영향력을 역설하며 체코 작가들의 정신이 곧 체코 민족의 생존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을 연설한 1967년 당시는 체코의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1968)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체코는 소련의 협력으로 2차 대전 이후 나치 세력을 성공적으로 소거하였으나 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동유럽 소국들을 단일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러시아의 입장과 민주화를 갈망했던 체코의 입장이 상충되면서 체코 민족 자체의 근간이 위협받기 시작한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을 읽으며 자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밀란 쿤데라가 왜 추방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정부의 입장으로 대변된 소련의 눈에는 자국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가 눈엣가시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greenblog.co.kr

그런데, 공산주의는 러시아 역사에 대한 부정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것의 실현일까?

그것은 분명 러시아 역사에 대한 부정(가령 러시아가 지닌 종교적 심성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실현(러시아의 중앙집권적 성향과 제국주의적 꿈의 실현)이다.

러시아 국내로만 보자면, 첫 번째 양상인 불연속성이 더 눈에 띈다. 예속된 국가들의 관점에서보자면 두 번째 양상인 연속성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48-49쪽

[납치된 서유럽]은 현재 러시아와 동유럽 세력간의 팽팽한 긴장을 서술했다고 봐도 무방한 작품이다. 1983년 [납치된 서유럽]이 집필될 당시 체코는 민주화로 향하는 걸음을 떼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독일은 나치 집권시절 러시아의 앙숙이었다. 체코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독일민족의 영향을 받아왔다. 중앙 유럽 국가들은 유럽내에서 이방인이자 약소민족으로 여겨져왔다. 게르만 혹은 슬라브라는 단일 미족을 꿈꾸는 세력들에 의해 그들의 독립성은 철저히 묵살되어왔으며 체코는 민족 소멸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다양성의 소멸이 곧 서유럽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한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순간 전체주의의 공포가 다시 유럽대륙을 덮을 것임을 기억해야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Es muss sein!" 이라는 문장이 생각난다. 필시 그래야만 한다는 독일어 문장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과 대비된 꼭 그래야만 한다는 첫 문장이 아이러니 했다 응당 그래야만 하는 "의무"는 강제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참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납치된 서유럽>을 읽으며 그가 왜 작품에서 무의미와 가벼움을 다룰 수 밖에 없었는지 통감했다. 언제든 뿔뿔히 흩어져 사라질 수 있는 먼지같은 나라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엔 "통용"이라 불리는 강제적인 가치관을 주입 시켰던 세력들. 밀란 쿤데라는 선택만을 해야만 했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자유를 침해받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하면서도 압박과 굴욕에 엉킨 인물들을 등장시키지 않았을까. <납치된 서유럽>을 읽으며 한 때 가장 좋아했던 작가인 밀란 쿤데라라는 사람의 의연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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