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가지 태도를 접할 수 있었다.
1. 재미도 없고 별로인데 왜 좋다는 거죠?
2. 엄청 좋은데 뭐가 좋은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 의문을 머리에 달고 첫 페이지를 폈다.
나는 어디에 서게 될까,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짧기도 하고.
완독 후 3번의 태도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3. 사소해서 좋다, 라고.
거대 악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사소한 선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 같다.
어떤 인간이 되려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사소하기 그지없어서 세상 모든 걸 사소하게 보고
그렇기에 자기 삶에서 사소하게 남더라도
그런 인간이 어째서 우리에게 중요한지.
이 소설의 소재인 막달레나 세탁소의 여성 착취를 파헤치며
고발 소설로 썼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긴장감과 자극, 재미를 만들 수는 있었을 지 모른다.
독자의 분노와 정의감이란 선명한 공감도 몇 배는 더 쉽게 끌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 방식이 지금의 이 소설보다 더 문학적이었을까.
소설가는 철저하게 그 길을 벗어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사소한 것들을 다루는데 그 방식조차 사소하다.
그게 이 소설의 메타적 미학 같다.
심지어 펄롱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생부의 존재조차 크게 다루지 않을 정도다.
지나치듯,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태도로 흘려보낸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태도...
출생의 비밀조차 드라마로 만들지 않겠다는 절제.
이 일관성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기 마련이고,
중요해 보이는 장면, 강조하고 싶은 순간이 반드시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썼던 문장을 땀흘려 지워내는 키건을 느낀다.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 대신 덜어내는 쪽을 택한 선택들, 그
그 과감함과 노련함이 읽는 내내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뚜렷하게 남는다.
“아, 사소한데 좋다, 아니, 사소해서 좋다."
알고 보면 이 소설의 바탕에는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거운 실화가 깔려 있다.
키건은 그 거대한 덩어리를, 마흔도 채 되지 않았고
생부의 얼굴도 모르며 어머니마저 잃은 한 소시민, 펄롱에게 조용히 얹어 놓는다.
하지만 펄롱은 그 짐을 지고 허우적대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에게 딱 맞는 무게만큼,
자기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진다.
그래서 그는 수녀원에 감금된 소녀를 ‘구출’하지 않는다.
구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도록, 그냥 데려온다.
사람들은 묻는다. 딸이냐고.
어느 범죄 집단에서 빼내 온 아이냐고 묻지 않는다.
소녀 역시 그 침묵에 조용히 동참한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나귀였다.
(119p)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전등이 켜진 구유 앞에 멈춰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셉의 밝은 옷도, 무릎 꿇은 동정녀도,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도 아니다.
크리스마스라면 당연히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들은 모두 주변으로 밀려난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옆에 서 있던 당나귀다.
말 없고, 사소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
집요하게 사소해지기로 한 작가의 태도-.
펄롱은 소녀를 구한 게 아니라 곁에 남긴다.
단발적 '구제'보다
사소해 보이지만 지속적이란 면에서 오히려 '구원'에 다가든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결코 시시하지 않은 감동이 와 닿는다.
사소해서 좋다.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대신,
사소하게도
사람 하나를 인간으로 남겨두는 이야기라 좋다.
정말로 사소한데, 그래서 더 좋다.
키건은 바로 그걸 해 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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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
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략)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111p)
이 부분은 소설 쓰기적 관점에 봤을 때, 시점의 오류처럼 보인다.
이 소설 전체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였으나
초점 인물은 펄롱이다.
화자가 펄롱의 눈을 통해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전지적 작가(제3의 누구/내포작가)는 펄롱을 내려다보며,
혹은 옆에서 동반하며 펄롱에 관해 쓴다.
펄롱이 보는 것 생각하는 것도 꿰뚫어본다.
펄롱이 슬프고 기쁜 때도 알아본다.
정확하게, 때로는 일부러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만들어 비뚜름하게.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이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그런데 여긴 시점이 이상하다.
네드의 행동이 은총이 아니었나.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이건 펄롱의 느낌이다.
고로, 그 문장의 주체와 화자는 명백히 펄롱인데 펄롱이 타자화되어
'펄롱의 곁에서',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나의) 곁에서
(나의) 구두를
이라고 바꿔서 읽었다. 내 경우는, 더 좋았다.
혹시, 자유간접화법으로 전지적 작가가 개입한 것이라면,
오류나 실책까진 아니지만 과히 설득적이진 않다.
왜 갑자기 전지적 작가가 이 모든 걸 정리하려 하는가.
거리감 느끼게시리.
더구나 그 다음엔 또, 바로 주어도 없이
잠시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로 이어지지 않나.
의도적이라고 하면 그 의도가 잘 읽히지 않는데,
물론, 이건 독자인 내쪽의 빈약함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