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소설 부는 젤소민아
  • 플래너리 오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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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2
  • : 3,927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일주일 전부터 한편씩 일고 있다.

같이 읽기로 했다. 글쓰는 사람들과.


매일 한편씩 읽고 단톡방에서 5줄의 후기를 나눈다.


오늘치 숙제는 <이녹과 고릴라>




어제 읽은 <행운>도 기가 막혔는데, 이건 또 다르게 기막히고 코막히고.

놀라움의 연속, 경이의 연쇄.


플래너리 오코너를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정도에서 

묵혀 뒀다는 사실에 땅 치고 후회했다.


오코너의 모든 단편마다, 그 어떤 소설 관련 수업이나 작법서에서 접하지 못했던,

혹은 살짝만 접했던, 혹은 내가 이해 못하고 넘어갔던 무언가를 배운다.


기회 되면 뭘 배웠나, 하나하나 풀어가 볼 참이다.

알라딘 서재란 것을, 말 그대로 '서재'의 기능으로 활용해 볼까 한다.


누구한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나중에 내가 다시 보기 위해 써놓기.


<이녹과 고릴라>


다른 사람에게 돋보이고 싶은 인물, 이녹은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그 욕망을 이미 이룬 인물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인물에 자신의 욕망을 위임하고자 한다. 바로 서커스단의 고릴라. 사람들이 고릴라, '공가'를 보고 환호하는 걸 목격한 이녹은 그 고릴라가 되고자 한다.


자신의 욕망을 직접 수행하지 못하고, ‘대리자’를 찾은 것이다. 


말하자면, 욕망의 외주화(outsourcing of desire)-.


이녹은 스스로 욕망을 실현할 능력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존재에게 자신의 욕망을 위임한다. 


서커스의 고릴라가 바로 그런 '욕망의 대리자'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여기까지는 아주 낯설지는 않다.

욕망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소설 속 인물은 숱하게 많았으니까.


욕망의 위임자 설정은 물론, 라캉과 지라르와 닿아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함에 매개를 거친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의 주체인 이녹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 혹은 매개인 고릴라에게 있다.

(물론, 이녹의 입장에서)


그 고릴라가 실재의 위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탈을 쓴 인간이란 사실!


신비로운 우상으로 보였던 고릴라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욕망은 허무로 드러나고 만다.


그러나 이녹은 허무할 새가 없었다. 더 나아가기로 한다.

그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녹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허무'와 '비탄'이 담보된, 타자를 매개로 한 욕망을 자신에게로 되돌릴 기회가.


바로, 고릴라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던 순간이다.


이제 그의 앞에는 아이가 두 명밖에 없었다. 첫 번째 아이가 악수를 하고 비켰다.

이녹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이녹 앞의 아이가 악수를 마치고 비켜서자

그는 유인원을 마주했고 유인원은 자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이녹이 그 도시로 와서 처음으로 잡아 본 손이었다.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잠시 손을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뒤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이녹 에머리야. 나는 로드밀 소년 성경 학교에 다녔어.

지금은 시립 동물원에서 일해. 네 사진 두 개를 봤어. 

나는 겨우 열여덟살이지만 벌써 시립 기관에서 일해. 

우리 아빠가 나를 여기로..." 


거기서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156p)


그러나 이녹이 시도한 정체성의 위임은 곧바로 좌절되었다.


작가와 독자, 모두 그걸 정확히 인지했다.

이녹만 빼고. 

이녹의 소외와 배제는 여기서 본격화, 아니, 이전보다 더 강화된다.


고릴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칠고 냉담하기 그지없다.


“저리 꺼져!”


이녹은 욕망을 대신 짊어 줄 타자가 무력하다고 인지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이녹은 욕망의 위임을 급기야 '모방'으로 전환한다.


욕망을 자기화하지 못하고 고릴라 탈을 훔쳐 쓰는 것으로 정체성을 모방하고자 한다.


잘 될 리가 없다.

그는 드디어 고릴라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자신을 본 사람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환호가 아니라 공포.

수용이 아니라 추방.


이녹이 욕망했던 '우상'이 '괴물'이 되는 순간.


어찌 보면, 우린 욕망하는 순간, '소외' 혹은 '배제'를 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별처럼 빛나고 돋보이는 존재 역시 어떤 각도에서 보면 '배제'를 경험하는 것 아닐까?


돋보임은 곧 시선의 집중이고, 시선은 언제나 구경거리와 낙인을 동시에 만든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순간에도 보라.


그 존재는 무대 위에서 고립되어 있다.


여기서 불현듯 끌어들이게 되는 기 드보르의 사유.


수동성은 분리의 본질적인 조건이다. 

“원자화된 군중” 속에 “고립된 개인”은 스펙타클을 필요로 하고, 

스펙타클은 개인의 고립을 강화시킨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어떤 이는 빛나지만, 어떤 이는 괴물이 된다

아니, 괴물로 비친다. 


이녹처럼.


생각해 보면,

욕망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타인의 시선과 환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환상에 모든 것을 위임할 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잃는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독자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욕망을 위임하는 자는 결코 그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며,

결국 자신의 (고릴라) 가면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자문했다.

내 욕망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니까.


그 욕망이 내 것인지, 타자의 것인지, 

오늘 하루는 곰곰히, 아주 곰곰히 생각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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