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 왠지 나랑 오래 갈 거 같다... 는 느낌이 드는 작가가 있는데, 제 경우 W.G. 제발트가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12년 막독 6기 '여행' 때 <토성의 고리>를 다뤘는데 5년 만에 20기에서 <이민자들>을 다루게 되었네요.
*<토성의 고리> 독후감은 http://blog.naver.com/leesiro/220648499763
<토성의 고리>는 일종의 '여행기'로도 읽히는 작품인데 특이한 것은 여행지가 주로 '폐허와 황야'라는 점입니다.
<이민자들>에서 제발트는 자신이 마주친 이민자들의 삶을 추적, 기록합니다. 일종의 '평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상적인 것은 제발트가 서술하는 이민자들의 내면 풍경이 폐허와 황야를 방불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폐허 전문가'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가 유럽인들(나아가 인류 전체)에게 미친 영향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폭력과 죽음의 선정성(그것이 갖는 즉각적인 호소력)과 선악의 뚜렷한 이분법에 기대어 이야기되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제발트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 담론 장에서 떠들썩하게 이야기 되지 않은 것들, 역사의 비극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운 좋게(또는 어쩌다 보니) 한 발짝 비켜서 있어 살아남았으나, 그 이후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와해되어간(그래서 하나의 ‘잔해'로 남은) 어떤 건물, 장소, 풍경, 산업 혹은 어떤 인물의 내면(=영혼)입니다. 이런 제발트를 저는 ‘잔해 탐험가’라 부르고 싶기도 합니다.
제발트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전쟁과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를 강조(악마화)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역사의 비극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설득력 있게 서술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최상의 예의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