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세계문학 읽기
  • 백치 - 하
  • 도스또예프스끼
  • 12,420원 (10%690)
  • 2009-12-14
  • : 3,074


나의 불가피한 해명

— 나 죽고 난 다음에야 무슨 일이 있건 말건Apres moi le deluge


어제 아침에 우리 집에 공작이 왔다 갔다. 요컨대 나보고 자기 집에 와 있으라는 설득이었다. 나는 그가 반드시 이런 얘기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확신했던 바였지만, 그는 별장에 있는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용이할 것이다’라는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했다. […] 나는 그에게 ‘나무’이야기는 난데없이 왜 하느냐고 물었다. 왜 그가 ‘나무’라는 단어를 끄집어 냈을까? […] 내가 나무 밑에서 죽든, 창밖의 벽돌을 보고 죽든, 그것은 매한가지이며 생명이 2주일밖에 남지 않은 내가 격식을 따질 처지냐고 공작에게 말하자, 공작은 즉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푸른 숲과 깨끗한 공기는 나에게 어떤 육체적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동요와 ‘나의 꿈들’이 어쩌면 호전될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다시 웃으면서 그가 꼭 유물론자처럼 말한다고 한마디했다. […] (595)



-
폐병쟁이 이폴리트의 ‘해명’. 

살 날이 2주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설정이다. 


사실 ‘유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폴리트 자신은 굳이 ‘해명’이라고 부른다. (간혹 ‘고백’이라 부르기도 한다.) 


폐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이폴리트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니까 위의 ‘해명’은 자신의 자살 결심이 어째서 정당하고 필연적인지를 사람들 앞에서 해명한 것. 뭐 간단한 얘기다. 어차피 죽을 거 미리 죽겠다는 것. 다른 방도는 없다는 것. 근데 이 내용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수십 페이지를 거뜬히 채워넣는다. 원고 깡패! 


폐병에 걸린 이폴리트가 집에 누워 있으면 창밖으로 이웃집 돌벽이 보인다는 설정이다. 이웃집이 메이예로프 씨네 집이어서 ‘메이예로프의 담장’이라고도 불린다. 괜히 멋져 보이는 네이밍이어서 평론가들이 작품 해설이나 평문에 (you know?__다들 알지?__의 느낌으로) 종종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은 이런 단순한 의미인 것. (메이예로프 씨는 소설 등장 인물도 아니다. 그러니 딱히 몰라도 된다. 돌벽으로 충분.)


근데 도스토옙스키는 이 ‘돌벽’ 상징을 꽤 자주 사용한다. '돌벽'을 넘어서는 게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중요한 주제다. 그의 소설 등장 인물 갖는 핵심 과업인 것이다. 그러니 독자는 돌벽에 대한 인물의 태도가 어떤지를 잘 살피면서 읽어야 한다. '돌벽' 상징은 항상 ‘돌벽’의 형태로만 제시되는 건 아니고, 수정궁, 철도, 2x2=4라는 수학 공식, 기계장치로서의 자연 등의 형태로 변주되어 제시된다. 


<백치>에서 이폴리트는 집에 누워서 돌벽을 보고 죽겠다며, 이 돌벽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며 옹졸하게 고집을 부린다. 


그런 이폴리트에게 ‘백치 성자’ 미쉬낀 공작이 제안한다.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이폴리트는 당연히 이 제안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차피 죽을 건데 나무 밑에서 죽든, 돌벽을 보고 죽든, 그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이 제안이 기억에 남았던 것인지 자신의 유서(=해명) 첫머리를 이 돌벽과 나무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그는 공작이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니 그보다 자기에게 진지하게 말을 걸어준 게 실은 무척 반갑고 고마웠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고맙단 말은 절대 안 하고 틱틱거리며 시비를 걸지만 말이다. 


-

일주일 전엔가 오랜만에 동네 천변 카페에서 된장질을 하고 있는데 문득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나무들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들과 사람들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반가웠고 동시에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읽고 있던 카프카의 편지글을 덮어두고 한참창밖을 봤다. 


-
체호프 작품에는 나무가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난데없이'의 느낌으로 등장한다. 자작나무, 소나무, 보리수, 버드나무 등이...... 나무들이 사람을 막 비웃기도 하고 그런다. 체호프는 나무가 있는 풍경을 소설 속에 자주 제시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나무는 가끔 등장한다. 그리고 내 기억에... 카프카 작품에는 나무가 거의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눈여겨 볼 일이다.)


-

창 밖으로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지닌 카페는(집은 말할 것도 없고) 무척 드문 것 같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동네에서는 오래된 단독 주택을 허물고 4-5층짜리 빌라를 올리는 공사가 계속, 쉼 없이 진행 중이다. 엊그제는 철거 직후의 모습을 봤는데, 5-6미터 정도 되는 나무 두 그루가 뿌리째 뽑혀 잔해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집 앞 집은 반지하층이 있는 다세대주택인데, 그 반지하층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거의 매일 1층 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곤 한다. 할머니가 없을 때 그 앉은 자리에서 뭐가 보이는지를 시험해봤다. 돌벽이 보였고 좁은 골목길이 보였다. 짧은 골목길 끝에는 또 다른 돌벽이 있었다. 그래도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일까? 폐지 줍는 할머니나 이웃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간혹 봤다. 가끔 내게도 말을 거신다. ‘아따, 금세 갔다 오네.’ 편의점에 도시락 사러 나갔다 오면 이렇게 한 마디 던지곤 하신다. ‘아, 네. ㅎㅎ’ 민망하고 어색한 짧은 대답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다. 


-
나무가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있었더라면 나무에 대해서, 또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 몇 마디 더 주고 받는 게 좀더 용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아니 꼭 무슨 대화를 주고 받지 않더라도 그냥 한 동네 이웃이니까 같이 보게 되는 무언가가...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가... 아니 꼭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더라도 그냥 그 자리에 있으니까 보고 있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이래서 옛날 소설이나 동화 보면 마을 노인들이 서낭당에 나무 뽑지 말라고 결사 반대하고 그랬던 걸까 싶고. 


-
'돌벽을 보고 죽는 것’과 ‘사람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죽는 것.’ 이것은 매한가지가 아니다. 양자의 차이를 깨닫는 게 어쩌면 도시 계획의, 우리 미래 삶의 첩경일지 모른다. 이 차이가 피부에 와닿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지금이 이미 늦었나...) 도시 계획 입안자들에게 <백치> 일독을 권하고 싶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