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이 흔히 알고 있는 구약의 몇몇 사건의 목격자로서 시공간을 넘나든다는 설정을 통해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한 두번쯤 가졌을 법한 의문을 여호와에게 다이렉트로, 아니 겁 없이 돌직구를 날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주제 사라마구의 해석과 상상에 수긍을 하든, 안하든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스토리를 갖고 있다.
구약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신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궁금해하며
자신이 원치 않는 결과를 선택했을 때는 가차없이 징벌을 내리고 진노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적 분노와 의문을 덮어버리고 과감히 신의 뜻을 수용한 아브라함에겐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극적인 양면성을 보여준다 .
예전에는 이러한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우리같은 인간은 감히 헤아릴 길 없는 섭리(믿음을 시험하고 단련시키기 위한)로써만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어 온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적인 신앙을 주입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현대의 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한 부분이 분명 있음을 간접적이나마
경험할 수 있고, 그런 영향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그 어디엔가 있을법한 신의 존재를 강한 확신은 갖지 못해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하는
그런 심리를 어느 정도 갖게 되는 것 같다.
1장에선 여호와가 결정적 실수로 말 한마디 못하는 두 사람에게 자신의 혀를 밀어넣음으로써 인간에게 언어를 부여한다는 설정이 조금 외설스러우면서도 흥미로웠다.
또한 인류가 번성하기 전, 자유가 주어졌지만 삶을 경작할 구체적인 방법 하나 없이 내쫓겨 황량하기 그지없을 태초의 땅에 첫발을 내딛었을 "지상낙원의 극소수의 거주자들"의 고독과 감정에 대한 부분은 전에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흔히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 운운했던 것이 이 최초의 사람들로부터 발원한 것이란 생각도 든다.
우선 에덴동산과 선악과의 문제로부터 원죄가 발생하는 에피소드는 내가 교리공부를 처음 시작한 날부터 갖던 의문이며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니, 선악과를 하나 따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에덴동산을 구경도 못한 후대의 인간들이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설정은 이 지구 어디에도 없는 연좌제의 극치 아닌가 하는....
또한 선악과를 먹은 걸로 모자라 생명나무를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신의 불안은 아예 싹을 제거함으로써 유일신으로 남고자 하는 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신 또한 인간과 다름없이 권력지향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 아닌가.
3장에선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롤모델로서의 카인과 아벨이 등장한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살인자인 카인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여호와의 불분명한 아벨에 대한 편애는 그대로 현재의 우리들 일상에도 투영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 없다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 좀 더 예쁜 자식과 이유없이 보기싫거나 정이 안가는 자식도 있는 것이 진실이다.
타당한 이유 없이 자신의 제물을 거부당했을 때 받았을 카인의 상처가 만져진다.
그는 애시당초 살인자가 되어야하는 운명이기에 신은 그의 제물을 거부한 것일까?
나는 주를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엿습니다. 따라서 의도로 보자면 주도 죽은 것입니다. - P40
이것이 카인의 진심이다. 최초의 존속살인(?)의 충동, 피의 강은 유구한 세월을 흘러 현재 우리 앞에까지 이르른 것일까? 도처에 피냄새가 만연하다.
이후 카인의 구약 여행이 시작된다. 그랑기뇰을 보는 듯한 무작위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비연쇄적인 사건들
생존을 위해 떠돌다가 그는 어느 성에 이르러선 늙은 노아 대신 릴리스의 침대에 들어 자신의 핏줄을 잉태시키고,
소돔과 고모라에 이르러선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황금 송아지를 만들며 퇴폐적인 유희를 즐겼다는 이유로 삼천명에 이르는 죽음을 목격한 카인은
여호와의 진노로 유황불에 타죽은 죄 없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분노한다.
신은 과연 누구의 하느님인가? 순명하는 아브라함만의 하느님인가?
허리케인으로 바벨탑을 일격에 부셔버린 여호와,
작가는 이를 여호와가 자존심 때문에 완성을 허락하지 않은 탑이라 말한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106 라고 적고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구약에서 빠질 수 없는 욥이 등장한다.
작가는 카인의 입을 빌어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p.163)
모르겠다고 한다. 더구나 신심 깊은 욥을 두고 악마와 벌이는 신의 내기라니...
목숨을 잃더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겠다는 욥의 아내의 말에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아니하겠는가" 라는 욥의 신앙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사탄이 여호와의 또 다른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넣고 싶어하지 않는 더러운 일을 하는 도구 같다는 (p.169) 욥의 아내의 말에 차라리 수긍하고 싶어진다.
욥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여 저주와 탄식을 늘어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체념의 필요성,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건 간에 그 뜻에 머리를 숙일 의무에 관해 설교한다.
이 설교는 현재까지도 제단 곳곳에서 진행중이다.
마지막으로 노아방주 이야기,
이것에 대한 과학적 검증의 노력은 현재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작가는 성경에 드러난 문자적인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인류의 멸망을 우려한 노아가 대항해를 앞두고 자신의 아내를 비롯하여 딸들까지 다 카인에게 허락했지만 카인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노아 스스로는 자살을 하게끔 유도한다. 이로써
신의 마음에 꼭 드는 신인류의 새로운 여정을 설계했을 여호와의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그 앞에서 카인은 당당히 자신이 모두를 죽였음을 실토한다.
망연자실한 여호와 앞에 카인은 자신을 죽이라고 하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의 말은 물릴 수 없다며
너는 텅 빈 땅에서 자연사할 것이고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이 네 살을 삼킬 것이다.
네, 당신은 내 영혼을 삼킨 적이 있지요. p.207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둘은 끝없는 논쟁을 벌인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신의 설계도대로 움직이는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생각,
시공간을 초월한 우리의 하느님은 온 우주까지를 돌보는 건 차치하고
이 지구에 관심을 갖고 계시긴 하는건가 하는 원망과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일상의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들의 기도가 신에게 도달하기까진 너무 짧고 미약했던가 ..
이 책은 사라마구가 86세에 발표한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비록 무신론자였지만 어느 유신론자보다도 신과 인간의 문제에 탐닉헌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 위트있고 환상적으로 펼쳐낼 수 있는 그의 역량이 느껴진다.
어쩌면 욥의 아내의 말처럼 신과 마귀는 같은 몸을 가진 두 얼굴일지 모른다.
신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여 창조된 인간인 우리의 모습 속에 카인과 아벨이 함께 사는 것처럼...
미흡한 신앙이지만 가톨릭 신자인 내가
가톨릭과 EU. IMF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은 한 무신론자의 거침없는 요설에 대책없이 빨려든 것 아닌가 하는 자책도 들지만 신은 설명되어지지 않는 존재라는 구태의연하면서도 변함없는 진리에 다시금 수긍하며 돌아선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예수 복음>을 서둘러 펼쳐보고 싶어진다.